세 번째 철학
산호세에서 보내는 요즘 평일 대낮 일상. 아이들 수영장에 넣어놓고 난 곁에서 맥북으로 서핑중. 3주간 나도 집안일로부터 떠나 휴가를 얻은 기분이다. 물론 곁에 항상 돌봐야 할 비글들이 두 마리나 있지만. 그래도 이 얼마나 복받은 일상인가. 나도 안다.
오늘은 심은하 언니의 페북에 처음 들어갔다가 워낙 읽을 글이 많아서 넋놓고 읽는 중. 언니가 올린 재범이 사진들 중에 저 사진들이 유독 눈에 꽂혀서 가져왔다. 저런 느낌 참 좋다. 훅 들어와 설레게 하는 느낌을 가진 얼굴. ornus 외에 내 가슴 깊숙한 공간은 우현이가 다 차지하고 있어서 재범이를 들여보낼 순 없지만ㅋㅋ 언니 글을 읽으며 공감이 가는 부분이 참 많다. 언니도 내가 어린시절부터 서태지를 좋아했듯 평생의 동반자,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이승환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요즘 재범이에게 빠져 허우적대시는데, 그래도 이승환을 향한 오랜 깊은 감정은 여전하시다고. 한 가지 큰 차이는, 공장장님은 좋은 여자 만나서 연애했으면 좋겠는데 재범이는 연애 안 했으면 좋겠다는.ㅋㅋㅋ 내 심정도 그런데 하. 태지오빠 마누라랑 깨볶으시나요? 맘껏 하세요. 근데 우현아 니 연애는 제말 우리 모르게 해. 나 정말 밥도 못 먹을 거 같아. 내 머리는 너의 행복을 누구보다 바라지만, 우린 너무나 부조리하고 연약한 인간이다. 인정해야지. 내눈으로 그 모습을 볼 자신은 없다. 우리 모르게 연애 해. 아니 알려지는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알려지더라도 팬들하고 만난 자리에서 애인 자랑, 애인 얘기하며 티내지만 않으면 돼. 지금까지 팬들에게 극진한 우현이의 행보를 보면 팬들에 대한 그 정도의 예의는 지킬 만한 사람이고 팬들의 절절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안심이지만.. 젊고 한창 예쁜 지금 홀로 수도하는 것도 아니고 네게도 영혼과 육체를 나눌 사람이 있어야지. 행복해야지. 팬들 앞에서 팬들에게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그 행복은 아프더라도 축복해야지. 정말 고통스럽지만 이게 사랑에 수반돼야 하는 성찰이다.ㅠ.ㅠ
언니는 학교에서만 마주쳤지 졸업한 이후에는 본 적이 없는 선배이자, 언니의 남편님도 같은 과 선배인데 그 옛날 내가 ornus랑 연애하던 시절이라 다른 선배들은 눈에 안 들어와도 이 선배의 외모와 조용조용 나직나직한 성품만큼은 눈에 들어와서 수줍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내가 싸가지가 없어서 선배들한테 인사를 잘 안 한 것도 사실이고, 김대교님한테는 수줍어서 인사를 더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하 언니와 김대교님이 저 먼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사진들을 보니까 왜 눈물이 나지. 대학 때 그 시절들이 밀려와서 그런 거지. 나도 스물 몇 살 그 시절이 있었지. 우현아 내가 나이를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니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들이닥칠 거라서 너도 시간이 흐르면 이 기분 알까. 사람 좋아하는 마음일 뿐인데, 내 나이가 부끄러워 현실에선 숨겨야 하는 이 고통을. 이 홈피에서나마 숨기면 내가 정말 내 자신이 아닌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라 그것만은 피하겠다. ornus에게 물어봤더니 자긴 무엇보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길 원한다고.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아무 가면도 쓰지 말라고.
해외에서 아이 키우며 살아가는 심은하 언니와 내가 각각 재범이와 우현이에게 빠져 있는 모습을 사회현상이라며 기사로 쓰는 사회부 기자를 한번 상상해보자. ‘돈 벌어오는 일은 남편에게 맡기고 아이를 키우며 숨쉴 구멍을 느끼는 중산층 여성들의 공허함(사실 난 아직 서민임;;)’ 어쩌구 하며 기사 하나 쉽게 써갈길 수 있겠지. 아마 그 비슷하게 생각할 인간들 분명 있을 거. 며칠 전에도 어딘가에서 그런 무성의한 잡글을 봤지. 미친새끼들. 그래서 니네들은 평생 순수하게 누구 하나 사랑하지 못하고 누구하나에게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는 거야. 난 어릴 때도 태지 오빠를 사랑했고 스무살엔 ornus를 미친듯 사랑했고, 단칸방에 살며 숨 돌릴 틈 없이 일해야 했을 때나 지금처럼 렌탈비 날려가며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 때나 뜨겁게 사랑했거든. 이것이 마냥 좋지는 않고 이 사랑으로 인한 정서엔 굴곡이 있어서 어쩔 땐 내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훑는듯한 고통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바쁠 때나 한가할 때나 사랑했다.
사랑이란 내 얼굴을 들여다보게 한다. 내 얼굴뿐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게 한다. 나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언니 글 중에 유독 기억에 남은 건 박진영 아래 아이돌 기획사에서 뛰쳐나와 우여곡절 끝에 자신만의 레이블을 만들어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픈 동료들을 모으고 레이블을 리드하며 음악을 해나가는 박재범을 보며 ” 나 자신은 아이에게 스스로 결정할 여유와 자유를 주는 부모인가” 고민하는 부분. 그리고 재범이를 들여다보면 노장철학을 배우지 않고도 노장철학을 실천하며 사는 인간 같은 자유로움에 끌리며, 내 인생 세번째 철학이 시작됐다고 하는 부분. 나 역시 내 인생 세번째 철학이 시작됐다. 서태지, ornus, 그리고 우현오빠.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뜨겁게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 솔직히 지금 다시 누군가가 가슴에 깊게 들어오는 게 싫어서 2013년부터 우현이한테 호감은 있었지만 그냥 지나가는 호감이겠거니 하며 밀어뒀다가 최근에야 인정하게 됐다. 홈피에 ‘My Hyun’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든 게 그 증거ㅠ.ㅠ 내 세 번째 사랑이구나..ㅠ.ㅠ 내가 이걸 받아들이며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ornus에게도 괜찮냐고 몇 번을 물어봤다. 몇 번을 물어봐도 네가 네 자신인 채로 사는 게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는 대답. ornus야말로 사랑하는 이의 맨얼굴을 받아들일 용기로 가득찬 사람이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신의 이 용기는 언젠가 내가 나 사실 레즈비언이야, 나 사실 트랜스젠더야 하고 고백해도 받아들여야 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며.ㅋㅋ) 이 세 명으로 인해 나는 인생에서 다른 무엇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의 극한을 체험하거나 맞닥뜨려야 했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자식을 넣지 않은 이유는, 난 자식은 정성 다해 키워서 사회에 내놓아 독립시켜야 할 타인으로 바라보게 되지 심하게 애착을 갖는다거나 로맨스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저 세명의 위치에 놓을 이유가 없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만 냉정한 엄마랄까.)
아 남편 왔다. 밥 먹으러 가야지. 다음 성찰은 다음에.
내가 좋아하는 느낌. 박진영 아래서 박진영에게 아부하지 않았던 깡다구 있던 재범이는 자신만의 기획사를 차려 나가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있다. 웃을 땐 소년스럽지만 무표정은 차갑고 상남자 같은 구석이 있음. 시애틀에서 자라났다고 하니 우리 아이들 생각도 나고 옆에서 ornus가 우리 아이들이 재범이처럼 깡다구 있게 크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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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on this post
그래..시애틀이 터가 좋은듯 하다. 자식 키우기엔. ㅋ
자식을 타인으로 바라보는거 격하게 공감..매일 도닦지만..이 도닦는 과정에서 재범이가 내옆에서 재롱을 떨며 계속 알짱대길 바라고있음..ㅋㅋ
어떻게 하필 재범이가 또 시애틀 출신인지.. 하고 많은 지역 중에.. 뭔가 이 상황이 웃겨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