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하나 나오겠네. 담론 세대에서 파편 세대로

  1. 담론 세대

사회가 변하고 매체가 변하는데 팬덤이라고 안 변하겠나. 피씨통신이나 인터넷 홈페이지 문화의 전성기였던 2000년대 초반부터 중후반까지, 이 시기는 분명 팬덤의 양상이 담론을 만들어가는 게 중심이 되던 담론의 세대였다. 내가 특히 토론과 논쟁을 좋아하고 담론을 형성하길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서태지팬덤 안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크게 받는 것일 수도 있다. 학생이던 시기에  20세 이상 서태지 성인팬들이 PC통신 안에 커뮤니티를 만들고 토론하고 논쟁하며 서태지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가는 걸 목격했고, 나 역시 미성년자도 참여할 수 있는 곳에서 토론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때 서태지의 성인 팬사이트에서 글 쓰던 사람들 중에 지금 유명해진 사람은 ‘전방위적으로 글을 잘 쓰는’ 강명석 문화평론가도 있고,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도 있고, 클래식 음악 전문지 월간 객석의 전원경 기자도 있고 만화가 김준범님,  ‘글쓰기 강좌를 강의하시고 여러 책을 내신’ 은유님(은공님)도 있고.. 여러 사람들이 기억 난다. 꼭 이렇게 네임드가 아니더라도 서태지 팬사이트에서는 항상 토론이 벌어지고 논쟁이 벌어지고 긴 글이 쓰여지고 때로 논문이 쓰여지곤 했다. 실제로 서태지 팬덤을 주제로 한 박사논문들이 사회학과에서 종종 쓰여지던 시기이기도 했고.

이제 이미 이야기 중심, 긴 글 중심, 담론 중심의 팬덤 문화가 약해진 상황에서도 서태지 팬들은 하던 버릇이 있어서 여전히 팬사이트를 만들고 그곳에 모여서 떠드는 사람들이 많다. 글의 양상은 좀 더 가벼워지고 좀더 사적인 이야기로 변하긴 했지만. 서태지 팬들이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팬사이트를 만들어 사람을 모으는 일이다.

   2. 파편화된 트위터 세대

약간은 뒤늦은 나이에 인피니트 팬덤 혹은 우현이 팬덤에 들어오면서 나는 새로운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이제 담론의 세대는 예전에 지나간(!) 것이다. 지금 팬덤 문화는 트위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트위터에 10분에도 수십개씩 새로 찍힌 우현이 사진이 뜨고 새로운 스케줄 장소에서 찍힌 우현이의 영상이 뜨고, 기존의 영상들을 재조합한 재밌는 패러디 영상들이 뜨면 실시간으로 이걸 파편화된 개인들이 즐기는 문화. 이것이 지금의 덕질 문화다. 메체의 특성이 변해감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팬사이트 예전처럼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논쟁하고 긴 글을 쓰며 수다 떠는 커뮤니티가 아니라 ‘내 스타(우현이)를 따라다니며 직접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찍어서 자료실에 올리는 곳이 팬사이트를 뜻하고 있다. 이 자료도 역시 제일 먼저 공유하는 곳은 트위터다. 그 자료실을 운영하는 마스터란 팬들이 트위터에 ‘어떤 자료가 새로 올라왔으니 가져가라’고 표시하거나 링트를 달면 팬들은 그 링크를 눌러 자료를 다운받는 것이다!

이분들이 찍는 사진의 퀄리티는 기자들보다 훨씬 낫고, 내가 이곳에 올리는 우현이 사진들도 다 이분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어낸’ 아름다운 사진들이다. 영상도 마찬가지. 방송국에서 찍어주는 영상에는 전 멤버가 다 담기기에 내 스타가 담기지 않는 부분이 훨씬 많고 카메라웍이 화려하기 때문에 춤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일명 마스터님들이 찍는 ‘직캠’에는 노래 시작부터 끝까지 우현이만 포커스된 화면 속에서 우현이가 어떤 식으로 춤 추고 노래하고 노래 휴지부에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떻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어떤 부분에서 팬들을 향해 웃어주는지, 어떻게 숨 쉬는지까지(!) 다 담겨 있다. 그리고 공연뿐 아니라 우현이가 공항에 갈 때, 우현이가 공식 스케줄을 하러 출근하고 퇴근할 때 찍는 일명 ‘출퇴근길’ 사진과 영상도 넘쳐난다. 다만 이렇게 찍어대는 팬들이 사생팬과 다른 점은 우현이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장소에는 안 나타나고 공식 스케줄에만 나타나서 빠짐없이 영상을 찍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 팬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모으고 긴 글을 쓰며 논쟁을 하거나 토론을 하는 팬사이트는 드물다. 물론 이건 우현이가 그룹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룹 전체를 위한 팬사이트’는 있지만 우현이 개인만을 위한 팬커뮤니티(게시판 중심, 이야기 중심)은 마이우현 이전에는 하나밖에 없어서 더욱 그래보이는 거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마이우현닷컴을 만든 거다. 예전과 같은 담론 중심의 사이트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현이 팬덤 안에서도 난 ‘사소한 수다’와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와 ‘진지한 단상과 리뷰’는 있는 팬덤을 만들어보고 싶다. 우현이 팬덤 중에 아주 일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겠다. 현재는 아주 소수의 팬들이 들어오고 있고, 트위터로 홍보를 시작했더니 가입자가 조금씩 늘고 있는데 내가 쓴 ‘아주 길고 지루한 리뷰글’에 리플을 달며 공감을 표시해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리플 길이도 아주 길다. 이게 내가 의도하던 바다. 그래서 ornus에게 사이트를 제작할 때도 ‘본문’만 중심이 되는 게시판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가 있는 글이 쓰여지면 그걸 ‘새 글타래’로 해서 그 밑에 실처럼 엮여들어가는 긴 리플이 달릴 수 있는 형식을 요구했고, ornus가 그런 형식을 구현하는 포럼 형식의 게시판, 익명 아이디를 자주 바꿀 수 있는 익명기능이 있고 아이콘 사진을 등록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게시판 형식을 찾아내줬다. 어찌나 멋진지!!!!

(근데 아무리 많이 동시접속해도 서버가 터지지 않는 사이트라고 그렇게 광고했는데 ‘서버랑은 상관 없지만’ 소프트웨어 오류로 어제 30분간 사이트가 멈췄다. ㅋㅋㅋ 시스템 장애라며 ㅋㅋㅋㅋ 이제 몇 번 더 그럴 거라고 ㅋㅋㅋ ornus 요즘 시스템 장애 복구하느라 디버깅 많이 하고 있다. 사실 이건 회사에서도 안 하는 일이다. ornus는 아키텍처만 설계하기 때문에;;)

 

아무튼…
팬들이 안 찾아오면 어쩌나 걱정도 조금 했는데 (그래도 오랜 시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소소하게 조금씩 늘고 있고 들어오자마자 긴 글도 써주고 긴 글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꼼꼼히 읽고 리플로 의견을 표시하는 팬들이 생겨서 힘이 나고 있다. 우현이도 이곳을 보고 있을텐데 분명히 힘이 날 거다. 우현이는 아마도 이런 글을 읽는 게 팬덤 안에서 자주 접해본 일이 아니라 굉장히 신기해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회원수가 늘어나면 분명히 그 안에서 재밌는 글, 유머 있는 글, 진지한 성찰적인 글도 더 잘 쓰는 팬들이 많이 나올 거기 때문에 기대가 된다. 진지한 것도 좋고 웃기는 것도 좋고.. 따뜻한 일상글도 올리면서도 때론 논쟁도 있는 커뮤니티가 되어갔으면 좋겠다. 보통 팬사이트에서 논쟁이 격해지거나 논란이 많이 되면 관리자가 지쳐서 사이트를 폭파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나랑 ornus는 끄떡 없다. 난 뭐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본 사람이라. 웬만한 일은 평온하게 지켜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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