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생각난 겨울

대학원 1학년 겨울이었다. 번거롭게 두 집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저녁에도 헤어지지 않고 같이 있고 싶었던 우리는 집이라기에는 조그마한 옥탑방에 살게 됐다. 어느 겨울이었다. 아침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하려고 방문 앞으로 갔다. 얇은 합판 두장으로 만들고 갈색페인트 칠된 방문은 외풍이 많이 들어와 동네가게에서 산 문풍지로 테두리를 막아두었다. 방문을 열면 좁은 마루가 오른쪽으로 있고 그곳에 간이싱크대와 보일러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루는 복도식아파트를 흉내낸 것마냥 간이벽과 유리창문이 달려있어 바람은 막아주었지만 추웠다. 방문을 열고 밤새 차가워진 마루바닥 장판에 맨발을 디디면 금새 발바락이 시려웠다.

세수를 하려고 종종걸음으로 간이싱크대까지 가서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밤샘추위에 수도관이 얼어버렸다. 세수도 못하고 하염없이 수도꼭지만 쳐다보다가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wisepaper와 함께 집밖으로 나왔다. 84번버스 종점근처에 있는 분식집에 가서 밥 일인분을 시켜 나눠먹고, 늘 하던대로 서점에 들려 책을 둘러보고는, 해가 중천에 뜰 즈음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주인집 아주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디 갔다왔느냐고 물어보는데,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니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밤새 얼었던 싱크대수도관이 따뜻해진 낮동안 다시 녹았는데, 때마침 내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로 나와서 옥상이 물바다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왜 수도꼭지를 열어두었냐고 성화고, wisepaper는 수도가 얼어붙게 허술하게 집을 지어놓은 당신네들이 잘못이지 왜 우리를 탓하느냐고 소리쳤다.

그렇게 난리통을 겪고 한 달 뒤, 우리는 옥탑방에서 짐을 빼 상도동 전철역 앞에 있는 고시원으로 이사했다. 고시원은 더 암울했다(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암울했다). 남녀층이 나뉘어 있는 곳이어서 우리도 하는 수 없이 각기 다른 방을 잡아야했고 이삿짐도 둘로 나누어 가졌다. 창문도 하나 없고 간이침대와 책상 하나가 전부인 방에 들어가 있으면, 마치 이 방 한칸이 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가슴이 조여왔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 우리 둘은 가평으로 달려내려갔다. 가진 돈 합쳐서 대출받아 부천에 조그마한 연립주택 하나를 구한 우리는 부모님들에게 이렇게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결혼생활 시작한 것이 십년 전이다. 그 십년 사이 나는 직장생활을 이어갔고 wisepaper는 사업을 시작했고, 우리 둘 사이에는 두 아들이 태어나 뛰어다닌다. 우리 둘은 어떻게 이리 만나게 되었을까, wisepaper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어있었을까. wisepaper를 빼고 나면 나란 사람도 내가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더 많은 역사를 담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여보 사랑해요.

Comments on this post

  1. wisepaper said on 2013-02-19 at 오전 10:33

    이게 므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꼼지락거리더니, 당신 수준에 너무 긴 글이 아닌가..요..응??
    공돌이도 새벽엔 센치해지는구나………..

    • wisepaper said on 2013-02-19 at 오후 12:07

      (+) 아침에 일어나 졸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오글거릴까봐 한 쪽 눈만 뜨고 읽어봤는데 지금 다시 보니까 잘 썼네. ㅎ
      난 하루에도 열두번씩 왔다갔다 하는 무서운 여잔데, 매일 이뻐해주는 당신이 제일 대단한 사람이야..^^

  2. 심은하 said on 2013-02-19 at 오후 6:09

    아름다운 추억이네요. 처음에 wisepaper가 쓴글인줄 알고 지혜가 대학원에 다녔었나 했는데 글쓴이 보고 깜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Trackbacks and Pingbacks on this post

No trackbacks.

TrackBack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