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해 ‘비평의 자유’를 막아선 꼴이라니
이번 사건은 그 위대한 ‘표현의 자유’를 수호한다고 나선 평론가들이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비평의 자유’를 철문으로 막고 봉쇄한 사건이다 이건.
평론가란 작자들이 수용자의 해석과 비평의 자유를 ‘표현의 자유 수호’란 철문으로 막아 선 코미디. 코미디다 정말.
난 이번에 이 평론가란 사람들에게 너무나 정이 떨어졌다.
애꿎은 출판사 동녘의 ‘표현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과문을 보고 나니 분노가 치민다.
해석과 비평의 자유를 비평으로 밥벌어먹고 사는 평론가들이 막아 선 꼴이라니. 자기들 맨얼굴이 부끄럽지도 않을까.
논란의 중심에서 즐기고 있을 로엔과 무리들을 생각하니 얄밉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분노까진 안 일어나는데
이 평론가란 것들 글은 이제 대중들이 소비하지 말고 읽지 말고 씨를 말려야 한다.
비평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작가가 작품을 내놓으면 대중에게 비평받는 건 당연한 일인데 비평의 자유를 평론가란 작자들이 헐벗은 밑천 드러내면서까지 철통방어하며 막아선 꼴이 우습다. 비평가가 비평을 봉쇄하다니. 비평하지 말라니. 어딜 가서 이런 개코미디를 구경할 수 있단 말인가!!!
‘표현의 자유 수호’의 논리를 들이밀려면 아이유의 노래가 국가기관으로부터 금지당했거나 그 비슷한 경우라면 말이 된다. 아이유의 노래는 그냥 발표됐으므로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았다.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발표된 작품은 대중으로부터 얼마든지 비판받을 수 있다. 금지되지도 않은 노래에 ‘표현의 자유’라는 논리를 왜 들이미는지?
누가 훨씬 와닿는 예를 들었던데
만일 미국에서 어느 팝가수가 공지영의 ‘도가니’ 속 아이들에게 성적으로 섹시함을 느끼고 노래 가사를 써서 불렀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쉬울 거다. 아동학대의 피해자인 제제와 비슷하게 와닿는 캐릭터로서의 예시인 것 같다. 한 정신과 의사의 트윗을 봤는데 많은 아동학대를 경험한 아이들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속 제제에게 자신을 감정이입하고 그 트라우마를 치료해나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제를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고 분명히 밝힌 아이유의 인터뷰와 노래 가사는 그들에게 명백한 상처라고. 세월호 사건의 학생들을 희화화한 그림과 만화들은 그럼 왜 대중에게 지탄을 받아야 했던가. 비슷한 경우다. 아이유는 노래 속에서 남과 다른 해석으로 특별해 보이기를 원하는 욕망이 앞선 나머지 아동학대의 당사자인 제제라는 아이의 본질은 증발시키는 실수를 저지른 거다. 평론가들의 헛발짚기는 여기서도 계속됐는데 “제제는 아이유가 만들어낸 상상 캐릭터”라는 말로 수호했으나 이 방어가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 아이유는 분명히 인터뷰에서 그 제제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속 그 제제와 동일인물이라고 친절하게 말했던 것이다-.- 물론 작가가 자기 작품 속에서 자기 뜻대로 표현할 표현의 자유는 있다. 그럼 그 작품을 세상에 내놨을 때 대중에게 비판을 들을 수 있는 거다. 대중은 비판할 자유가 있고.
내가 바닥 드러낸 평론가들의 얘기를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천천히 다시 읽어봤는데 이들은 그냥 처음부터 자기가 잘 아는 주제인 “표현의 자유’를 말하고 싶었을 뿐 대중이 어떤 부분에 대해 상처를 받은 건지, 어떤 부분에 더 생각할 거리가 있는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가 마침 나왔으니 자기가 하고싶은 얘기만 앵무새처럼 늘어놓을 뿐. 대중과 소통하려는 생각은 1그램도 없었던 거다. 토론의 과정에서 상대의 말을 듣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확인한 며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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