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자유, 성찰, 고유명사의 인문학

지금으로부터 2년도 훨씬 전에.. 한국 살 때 썼던 글인데.. 갑자기 떠올라서 가져온 글. 강신주의 얘기들이 욕도 많이 먹고 특히 기존 인문학자들이 봤을 때는 개념없는 철학이라는 비난을 많이 듣는데, 난 강신주가 일관적으로 강조하는 ‘자유’와 ‘사랑’에 대해 읽을 때면 속이 뻥 뚫리듯 시원하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자유’와 ‘사랑’이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구조로부터 오는 억압을 알아차린다고 말하는 부분도 통쾌하다. 자유와 사랑. 그리고 성찰. 내 평생의 화두. 인간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장 자유로울 때가 바로 사랑할 때다. 나를 억압하고자 하는 모든 주위와 배경이 물러나고 오직 나만이 주인공이 되는 상태. 사랑할 때. 분명 연애를 하고 있는데 나와 상대가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라 자꾸 주변인들이 의식되고 미래가 걱정된다면, 진정한 자유를 체험케 하는 사랑에 빠진 상태는 아니다. 진짜 사랑할 때는 눈에 뵈는 게 없다.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 극치를 체험하는 상태라는 거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다. 결혼은 끊임없이 내 뒤에 있는 배경, 가족, 상황, 미래를 의식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와 ornus가 해나가는 결혼생활은 결혼 같지 않은 결혼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결혼생활이 가능할 수 있을까 실험하듯이.. 물론 우리에게도 세속적인 일상이 있고 무시할 수 없는 구조와 습관이 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나는 ornus와의 결혼생활이 제도로서의 결혼이 아니라 낭만과 자유가 살아숨쉬는 ‘사랑하는 나날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열음이 은율이와의 만남도 그렇지만 내겐 우현이를 발견한 것도 내 인생의 특별한 신호로 다가온다. ‘사랑’과 ‘성찰’이 중요한 화두였던 내게, 수많은 스타들 중 하필이면 ‘사랑’의 의미를 온몸으로 현현하고 살아가는 듯한 이 신기한 생명체를 만난 것은 말할 수 없이 의미 있는 일이다. 우현이는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도 유독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처럼 회자되곤 한다. 오죽하면 별명도 ‘사랑둥이’ ‘하트왕자’ 같은 것들이다.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공간만을 쓸 수 있는 이 삶 속에서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다고 말하고 그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우현이는 내 인생의 철학과 화두에 대해 온 우주가 긍정적으로 대답해준 것과 마찬가지다. 우현아 널 만나서 내 화두는 더 확실해졌어.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과 자유와 성찰이야.

 

-> 내가 2013년 7월에 썼던 글..

고유명사의 인문학, 사랑, 정치, 경쟁…

호/오를 불러일으키는 대중철학자 강신주는 인문학은 ‘고유명사’의 학문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인문학자가 지향해야 할 것은 그래서 ‘자신의’ 학문을 만드는 거다. 모든 인문학과 문화 예술의 핵심은 고유명사라는 거다. 대학교에 있는 철학자들이 백날 칸트와 헤겔과 들뢰즈와 푸코와 노자와 장자를 연구하더라도, “지금 이 시대, 이 사회에서, 나한테 칸트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 학자는 다 문제다.

(강신주는 철학적으로 ‘시’읽기 저작을 몇 권 냈는데, 이건 시 평론과는 다르다. 강신주는 자신의 인문정신의 핵심을 김수영의 시에서 봤고 김수영을 인문학자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김수영은 4.19의 시인으로 알려져있고 굉장히 체제적인 프레임이 씌워져 있는데, 실은 김수영은 4.19의 시인이 아니라 분단의 시인이다. 김수영의 인문정신이 싹튼 절대절명의 상황은 북이냐 남이냐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를 선택하라는 이념과 패권이 만든 프레임이 자신에게 주었던 고통이다.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분열. 이런 김수영의 고통을 산문화한 사람이 <광장>을 쓴 소설가 최인훈이다.)

수백년 전의 개념이 지금 이 사회에서 무엇인지 연구하려면 사회를 치열하게 연구하고 굉장한 애정을 갖고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런 학자 별로 없다. 정치에 참여하는 학자를 ‘폴리페서’라고 낙인 찍는데 그 프레임은 사실 보수여당 거다. 너희는 정치하지 말라는 건데, 사는 게 전부 정치인데 정치하지 말라는 것도 모순이고 이런 정치인들이 원하는 건 너희들은 노예다. 너희들은 정치적 주권이 없다는 거다. 정치하는 사람과 정치하지 않는 사람의 분업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근본적 분업이고, 분업논리는 가장 강력한 보수적 프레임이다. 지금 사회가 신음하는데 젊은이들이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 속에서 거의 사망신고 받기 직전인데 이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인문학자는 인문학자가 아니라는 거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고 고유명사의 학문이기 때문에.(그래서 강신주는 ‘사회계약론’도 굉장히 비판한다. 사회적 계약을 통해 정치적 주권을 대의적으로 행사한다는 개념에 대해서 비판적인 거다.

인문학은  ‘우리’도 아니고 ‘그들’도 아닌 ‘나’를 위한 학문. 내가 누구인지 알고 세상에서 내가 주인공으로 살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 지금 인문정신이 더 필요한 것은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힘들게 할 때 나는 나를 알아야 하고 강해져야 한다. (강신주가 자꾸 ‘나’에 대한 얘기를 하고 ‘나의 자유’에 대한 얘기를 하니까 왜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는데, 그는 자유로운 사람만이 인간의 억압구조를 발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에서도 실존주의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가 나온거다. 구조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할 수는 없고 자유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고통 -구조로부터 오는-을 느낀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거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을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가장 극적인 순간은 사랑할 때다.

사랑은 나와 너 이외의 모든 억압과 조건과 상황과 제3의 인물들을 배경처리하는 것.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받고 또 내가 그를 사랑할 때 이 세상에서 나는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강신주는 제발 사랑을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은 ‘미래가 없는 것처럼’ 오직 현재를 사는 것. 미래를 위해 지금의 기쁨을 억압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을 구겨넣을 때 사랑은 없는 거다. 결혼한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게 노후를 위해 저축하고, 미래에 살 아파트를 위해 지금 여행 안 가고, 미래를 위해 지금 안 노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강신주는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거는 굉장히 본질적인 개념이다. 그는 자본주의 경쟁 논리를 비판할 때도 이 ‘사랑’ 개념을 이야기한다. 자본주의가 문제인 건 사람에게 ‘경쟁’과 ‘분리’를 내면화한다는 건데 이것들은 ‘사랑’, ‘공존’, ‘신뢰’의 반대개념들이다. 자세히 풀어쓰면 “경쟁, 분리가 인간 사회에 일어나면 체제(자본주의)가 이기는 거고, 반경쟁, 사랑, 공존 쪽으로 가면 체제가 붕괴되는 거다. 서로 사랑하지 않게 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체제다.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거다. 우리의 사랑을 막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비판적 지식인이 되는 거다. 이 공식을 잊어버리고 인문학자가 분리와 의심, 불신 쪽으로 담론을 펴면 자기도 모르게 체제에 놀아나게 되는 거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경쟁 체제가 바로 사랑 못하게 만드는 교육제도, 1등 한 아이도 성적이 떨어지면 자기를 미워하고, 1등 못하는 아이는 1등 한 아이를 미워하고. 굉장히 심각한데, 이 아이들이 나중에 기성세대가 되면 그 때의 파국은 끔찍할 거”라는 거다.

실은 사람들이 자기를 경쟁의 판으로 내몬 사람들에게 문제 제기를 해야 되는데, 신자유주의는 이 사고조차 못하게 사람들을 마비시키고 있는 극단적 체제다. 이 신자유주의 안에서 30년간 성장한 아이들이 나중에 만들어낼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이건 심각한 징후다. 그리고 자살하는 아이들은 1등하는 아이들이거나 1등 근처에 가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경쟁’논리를 강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에 그 판에서 다른 희망을 찾지 못한 거다. 꼴찌하는 아이들은 자살 안 한다. 경쟁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 사회에서 살면서 꼴찌하는 거는 걱정이 안 되는데 ‘경쟁논리’를 내면화하는 게 더 무섭다. 강신주도 말하는 건데 30년을 부모 잘못 만나 큰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는데도 거의 30년이 걸리는데 이 신자유주의식 경쟁논리가 수십년간 내면화된 아이들을 어떡할 거냐는 거다.

…………………………..

 

Comments on this post

  1. 암헌 said on 2016-02-11 at 오전 4:54

    그러게.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되는건지 의문이다

  2. wisepaper said on 2016-02-11 at 오전 10:20

    그래 그치.. 요즘 시애틀 하늘이 새파랗고 바람은 봄바람이라.. 우중충할 때 다녀간 너희들이 아쉬워져서 어제 윤주씨한테 말걸었다~ ㅎㅎ

  3. 엠제이 said on 2016-02-12 at 오전 9:35

    사랑과 자유… 언니와 딱 어울리는 단어들 같아요.
    사회 속의 공존, 신뢰, 반경쟁… 우리가 더불어 살면서 더 성장할 수는 없는 걸까요…? 무조건 경쟁시키고 무조건 민영화 시키는 게 답이 아니라 생각하는데, 윗선에서 체제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구조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밑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괴롭히고 부려 먹는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요…
    그래도 13년의 언니 마음보다 지금은 조금은 더 편하실 거 같아요. 이곳에선 열음이와 은율이가 조금이나마 더 자유롭게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Trackbacks and Pingbacks on this post

No trackbacks.

TrackBack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