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를 아는 시대가 열리기를 기원하는 시

 

이번 한국 여행에서 내게 가장 진한 흔적으로 남은 것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보았던 영화 ‘동주’와 윤동주의 시들이다.
이 영화와 동주의 시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흘러넘치는 이 감정을 처리하기가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동주의 아픔 앞에서 한낱 사소하게 작아지는 나의 아픔.
덕분에 나는 지금 내 구멍을 조금씩 메우고 있다.

흑백영화 곳곳 주요 장면에서 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의 입을 통해 윤동주의 시들이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

몇 달 전부터 이 영화가 너무 보고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아래는 이번에 영화를 보기 몇 달 전에 여기저기서 저장해뒀던 영화 속 장면들과 동주의 시 나레이션..
오랫동안 이 게시판에 비공개로 저장해두었던 것들을 이제야 공개로 돌린다.

 

006바람이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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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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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길 새로운 길

 

 

010쉽게쓰어진시2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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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007참회록

 

공상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천공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시 ‘공상’이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정말 주룩주룩 눈물이 흘렀다.
명예와 허영의 천공에다 공상을 쌓는다는 말에서 참을 수가 없이 울음이 쏟아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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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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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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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늘.. 정말 좋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건 강하늘이 직접 주제곡을 녹음하는 장면과 영화 촬영하는 장면, 영화를 편집한  뮤비

 

 

….

이건 강하늘이 부른 노래와 영화 속 장면을 편집한 뮤직비디오

 

감정의 강요 없이 덤덤히 절제된 연출도 좋았고 무엇보다 강하늘의 연기가 참 좋았다.
강하늘의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톤이 살짝 가라앉아 보였는데 그 덕에 일정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강렬한 연기보다 더 서서히 묵직하게 꽂혀왔다.

시종일관 과잉 없이 살짝 가라앉은 나른하기까지 해보였던 강하늘의 연기가 점점 갈수록 애달파져 오고 끝내는 한없이 가여워졌다.
맑고 아름다운 시심을 천명처럼 안고 태어났지만 시대의 무게 속에서 시인으로 살기 부끄러웠던 청춘이었던 윤동주, 그 미완의 애달픔 자체였던 강하늘.
정말 좋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아픈 청춘의 얼굴과 시를 읽는 낮은 목소리, 주제곡을 직접 부르는 부분까지… 우현이도 잘 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청춘의 얼굴.. 현이 얼굴에도 있는데… 결국 시집을 몇 권 사면서 우현이 것도 똑같이 사서 선물로 놓고 왔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지용, 김소월, 한용운의 시집과 시인 신현림이 엮은 시집. 왜 시집을 선물하는지 이유까지도 길게 쓴 편지와 함께. 요즘 그와 관련된 어떤 소식도 보지 않고, 마이우현마저 안 들어가고 있다. 마치 휴가를 떠나온 거 같은 기분.. 이렇게 잠시나마 거리를 두고 있으니 그동안 안 보였던 게 보인다..

씨네21에 정말 좋은 평이 있더라. http://www.cine21.com/news/view/group/M502/mag_id/83156

이 평의 마지막 몇 문장이 너무 좋아서 가져온다.
…..

영화의 마지막, 피를 토하며 옥사하는 윤동주를 비추던 카메라는 이어서 감옥 창살 너머로 반짝이는 별을 비추고, 윤동주의 <서시>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이 순간 <서시>는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미학을 담은 대표작인 동시에 염치를 아는 시대가 열리기를 기원하는 머리시가 된다.

…..

 

염치를 아는 시대가 열리기를 기원하는 머리시가 된다..

 

Comments on this post

  1. 엠제이 said on 2016-08-24 at 오전 8:40

    저도 언니께서 올려주신 사진 보면서 우현이가 같은 역할을 했어도 어울렸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항상 먼저 알아보시는 언니셔요 b
    잠깐 거리 두시면서 언니께서 좋아하시는 다른 여러가지 것들에 신경 쓰시는 것도 좋은 거 같아요. 이런 시간을 통해, 더 성찰이 깊어지시는 거 같아요. 곧 만날 때까지 언니 힘내요 <3

    • wisepaper said on 2016-08-24 at 오후 12:09

      그치..? 시를 읽는 목소리도 좋을 거 같고, 심지가 있어 보이면서도 어딘가 안쓰럽고 애틋한 얼굴도 잘 어울릴 거 같고….
      널 볼 생각하니 넘 좋다..

  2. wisepaper said on 2016-08-27 at 오전 12:50

    명원이 어머니랑 이야기도 해보셨구나.. 와… 어머니 좋은 분이실 거 같네요. 그런 염려를 하시는 거 보면.. 저 같아도 그럴 거 같아요. 인기는 정말 한낱 거품일 뿐인데.. 어쩜. 제가 이번에 우현이한테 주려고 놓고 온 편지에 썼던 내용과 같네요. 사람들의 인정과 찬사에 너의 마음을 두지 말고 네가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에서 너의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진짜 멘탈 꼭 붙들어매고 자기 갈 길을 잘 갔으면 좋겠어요.. 그게 안 되면 끝없이 무너질 수 있는 곳이 그곳인데.. 우현이 어머니는…? 여러명의 팬들과 단체로 가서 만나 뵌 거라서 어머님과 따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어요..ㅠㅠ 속으로는 그런 생각 하실지 몰라도, 겉으로는 그런 말씀 하는 스타일이 아니세요.. 자리가 자리어서 그런지 유쾌한 농담하시고 소탈하게 웃고 이야기하시는 스타일..

    헤헤 서정적인 분위기에 가끔은 싸늘한 예민함. ㅎㅎ 우현이와 잘 어울리죠.? 우현이도 작은 역이어도 좋고 큰 역이어도 좋으니 좋은 캐릭터 만나서 차근차근해나가면 연기 쪽으로도 좋을 거 같은데.. 대교오빠도 우현이가 연기 쪽으로 잘 어울릴 거 같다고 그랬잖아요. 암헌도 그러더라구요. 우현인 연기가 되게 잘 어울려 보이는 얼굴이라고.. 팬도 아닌 남자 둘이 이런 얘길 했으니 솔깃하네요. 근데 참.. 캐스팅이란 게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운때도 맞아야 하고, 인피니트는 스케줄이 많아서 스케줄 땜에 작품 놓친 멤버들(호야가 그러더라구요)도 있고.. 쉽진 않겠죠. 얼마나 고민이 많을까..

    •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8-27 at 오전 3:45

      우현이한테 이번 편지에 참 좋은 얘길 해줬구나. 우현이 그거 읽고 우는거 아냐? ㅋㅋ
      우현이 내가 봐도 배우 얼굴인데..
      표정에 감정선이 살아있잖아.
      사실 난 송*기같은 얼굴은 별로 안 좋아해서 내 심미안을 맹신하진 말아야겠지만..(그래도 성규한테는 배우 얼굴이라고 안하니 제정신이지? ㅋㅋ)
      암튼 좀 섬세한 감정연기 잘할거같아. 권상우가 주로 맡았던 역들도 잘 어울릴거같고.

      • wisepaper said on 2016-08-27 at 오전 9:25

        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들이 요즘 왤케 저한테 힘이 되죠? ㅠㅠ

        그래요 저도 언니가 언급한 그 배우 얼굴엔 감흥이 별로 없네요.. 우현이 감정선이 섬세하고 그게 표정에도 잘 드러나서 기회만 잘 잡으면 연기로 되게 좋은 길이 열릴 거 같기도 해요!

        그래도 성규 뮤배 아닙니까 뮤배~~~~~~ 언니 대신 저라도 한번 봤어야 하는 것을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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