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핑

 

 

인상 깊은 몇 구절만 타이핑하려고 시작했는데, 이렇게 길어질 줄은. 많은 문장들이 좋아서 더 타이핑하고 싶은 걸 참았다.
소설 <환상통>은 아이돌 민규를 사랑하는 m과 만옥, 그리고 만옥을 짝사랑하는 남자 민규(이름이 똑같다)의 이야기로 3부로 나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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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m의 이야기

 

만옥을 만나기 전, 마음속에 사랑이 넘쳐 담아둘 길이 없을 때면 나는 귀중한 이 얘기를 사람들에게 했었다. 대부분 말없이 들어주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무관심과 은근한 조롱을 느낄 수 있었다. 노골적인 사람들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예의바른 사람들은 미소지으며 자신들의 관대함을 들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경멸보다도 그 관용이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라 나는 점차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됐다.- p.10

활동중엔 매일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기에 만옥과 나의 대화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함께 성지순례를 나선 순례자들처럼 끝없는 교리문답을 반복했다. 새로운 무대와 새로운 방송, 새로운 행사를 멤버들과 함께했다. 쏟아지는 정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러나 모든 성서가 그렇듯, 어떤 에피소드도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는 멤버들의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사례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나눈 것은 매번 같은 이야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 P.12

나는 만옥이 가끔 연습실 앞이나 숙소 근처를 의도적으로 배회한다는 걸 알았다 …… 백 명의 팬이 있다면 사랑하는 백 개의 방식이 존재하겠지만, 멤버들의 개인 스케줄까지 따라다니는 사생팬은 척결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나 역시 만옥이 그런 얘기를 꺼낼 때면 불편한 기색을 은근히 내비치곤 했지만 – 고백하건대- 만옥이 하는 얘기 중에 그만큼 매혹적인 얘기도 없었다. 나는 매번 사생활은 안 돼, 사생활은 안 돼, 하며 나를 타일렀다. 그렇지만 결국 만옥의 얘기를 듣기 위해 귀기울일 때, 그 굴복은 무척 감미로웠으며 만옥이 몰아쉬는 숨까지도 독약이 든 성배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는 귓바퀴를 따라 창자까지 돋아나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P. 16

 

아름다움 앞에 나는 얼마나 나약했던가. 절망과 무력감에 몸을 떨며 나는 내 고통의 근원을 입 밖으로 꺼내길 원했으나, 어떤 표현도 늪에 빠진 시체처럼 차게 인광을 발하는 말에 불과했다. …(중략)… 때론 비명을 지르거나 발작적으로 ‘사랑해’라고 외치기도 했으나 그런 말을 뱉은 뒤엔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눈물이 되어 나왔다. p.18

팬의 시간은 대부분 기다리는 시간이다. 음악방송이 있는 날, 팬들은 아침부터 방송국 앞에 모인다. 그곳에서 멤버들이 출근하길 기다리고, 출석 체크 시간을 기다리고, 입장시간을 기다린다. 방송국에 들어간 뒤에도 기다림은 계속된다…… 막냇동생도 못 되는 어린 팬들 사이에 서 있노라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나도 내 할 일이 있는데, 내 나이가 몇인데,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도 했다. 자주 온다고 해서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멤버들과 어떤 관계도 갖지 못하는데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때로는 한나절을 꼬박 기다렸어도 멤버들의 눈, 코, 입도 구분 못할 먼 거리에서, 오로지 ‘멤버들을 봤다’는 기억만을 간직하고 돌아가야 할 때도 있었다. 어째서 사랑하는데 이렇게 멀리서 볼 수밖에 없는 걸까. 그럴 때면 나는 매번 오늘이 끝이야, 오늘을 끝으로 더이상은 따라다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어김없이 월요일만 되면 다음날 있을 음악방송 입장을 신청하게 되는 것이었다. p.19

(만옥이 말했다). 기억 역시 변질되기 마련이더군요. 마치 꽃처럼요. 어떤 순간을 기억해야지, 하고 의식하는 순간 시간의 흐름에서 잘려 나와 뿌리를 잃어버리는 꽃, 나는 두려웠어요. 자주 만지면 금세 시들고 오래 두면 말라버리는 꽃이. 특별한 한때, 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기 위해 내 손으로 죽인 그 기억은 얼마나 오래갈까요….(중략)… 고민 끝에 내가 택한 것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그 안타까움을 받아들이는 쪽이었어요. 한순간을 미련 없이 사랑하자. 그리고 떠나보내자..(중략)…. 내가 문장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이 문장에 끌리는 사람이라면, 만옥은 이 문장이 담고 있는 뜻-그것은 전적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터였다- 때문에 이 문장을 사랑할 인물이었다. 그녀는 언어를 믿지 않았고 사진을 밎지 않았다. 박제를 거부했고 박제의 쓸쓸함을 거부했다. 어쩌면 멤버들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간직하고 싶던 만옥은 자기 방이 하나의 소우주처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수집된 기록들로 넘쳐날까봐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 전에 차라리 잊는 방법을 택한 건지도 모른다.-p.27

 

보통 팬의 역할을 두 부류로 나눴을 때, 누나팬과 이모팬은 실질적 자금줄이고 발로 뛰어서 오빠들을 응원하는 건 소녀팬의 몫인 경우가 많았다. 나이는 누나팬이지만 자금은 소녀팬이었던 나는 어디로도 분류되지 못하는 어중간한 존재였다. 나는 다른 게 아니라 그런 것이, 사인회 같은 알짜배기는 가지 못하고, 무료 행사조차 시작시간에 간신히 맞춰 뛰어가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p.31

그날 이후 나는 단순히 공개방송에 출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경험을 기록하기로 했다. 기록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은 당연히 이미지였는데…… 그러나 사진은 엄밀히 말해 ‘나의 기록’이 될 수 없었다….(중략)… 그러나 실은, 그보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자신을 찍는다는 것을 아는 멤버들이 카메라를 향해 보내는 윙크나, 손가락하트 따위의 제스처였다. 비록 멤버들이 쳐다보는 건 거대한 렌즈일지라도, 나도 그 애정표현을 한순간이라도 받고 싶었다….(중략)… 나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카메라와 렌즈의 별칭을 검색했다. 그리고 그것의 정식 명칭을 찾아내어 가격대를 알아본 순간, 그 깊고 넓은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한 입회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기기는 내가 넉 달을 구황작물만 먹고 버틴 다음, 그것을 지켜본 천지신명이 노력이 가상하다며 계좌번호를 부르라고 해야지만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나는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을 포기했다. 다음으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글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런 식의 글쓰기를 반복하며 점차 나는 한계를 느꼈다. …(중략)… 예를 들어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미 수백 년 동안 ‘아름다운 것’을 위해 봉사한 언어였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 점, 이미 많은 이들이 가장 정확하다고 판단하여 사용한 탓에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이가 상대방을 수식하기에는 너무 닳아버린 언어였다….(중략)… 어느 순간 이 기록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아름답다’가 수식하는 멤버들까지 지겹고, 입 아프고, 지친다고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인양된 조각상에서 따개비를 긁어내듯, 언어를 긁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내가 시도한 것은 사랑에 대한 미문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도서관에 있는 모든 연애소설을 읽음으로써 이별의 고통을 극복했다는 얘기를 듣고 떠올린 방법이었다. 사랑에 대한 명문장을 필사하다보면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어째서 이것은 명문장인가, 어째서 이것은 내 마음을 울리는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방식을 따라 하다보면 멤버들에 대한 내 마음도 오래 살아남을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독자인 내가 화자와 동일시될 수 없으니 독서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책 속의 인물들이 죽네 사네 해도 그것은 내게 희극에 불과했다. 주인공이 던지는 회심의 문장 또한 공허한 외침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비딱하게 연애소설을 봤던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사랑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팬의 사랑은 대중매체가 등장하기 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이상한 사랑이다. 모든 연애소설, 심지어 짝사랑을 다루는 소설에서도 인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방과 ‘관계’라는 걸 맺는다. 그러나 팬의 사랑은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사랑이었다. 한번은 지독한 짝사랑 소설이 있다고 해서 잃은 적이 있다. 어쩌면 이 소설만이 유일하게 나의 얘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해 고통 속에서 죽어간 그녀는, 비록 하룻밤 상대일지라도 몇 번이나 그와 동침한 적이 있는 여자였다…(중략)… 이야기 초반, 여인이 찬 바닥에 누워서 사랑하는 남자의 발소리를 기다리는 대목에서 눈물을 삼키던 나는, 그녀가 그의 방에 초대받던 순간에 느꼈던 배신감을 잊지 못한다. 그녀와 달리 내가 ‘그’의 방에 초대받을 확률은 0에 수렴했다. 나는 절망했다. p. 41

그러나 내 사랑의 특수성을 떠나서도 나는 대부분의 연애소설에 공감할 수 없었다. 여자 화자들은 이해되질 않았으며 남자화자들은 소름끼쳤다. 나는 그토록 많은 남자들이 어린 여자들에게 매혹되고, 또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나이 많은 남자에게 매혹되는 것에 놀랐다. 나는 어린 남자들을 사랑했다. 그것은 내가 유아기 때나 청소년기, 그리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한결같은 취향이다. …… 내가 사랑한 남자들은 언제나 육체적으론 가장 아름답고, 정신적으론 불안정한 시기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리석고, 맹목적이며,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했다. 취향이 없고, 말이 많으며, 언제나 노골적으로 애정을 갈구했다. 나는 그 눈멂을 무척 사랑했다. p.42

 

나와 마찬가지로 만옥도 N 그룹에서 M을 가장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는 것은 단지 호의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에 불과하다. 나는 닭갈비를 좋아한다, 초콜릿을 좋아한다처럼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표현하는 말에 불과하다. M이 자주 밉고, M을 생각할 때면 고통스럽고, 가끔은 M을 증오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한 것은 M을 향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감정을 숨기고 태연함을 가장한 것과 갈리, 만옥은 당당하게 M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 대다수의 아이돌팬들이 유사 연애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이를 억누르고 부끄러워하는 것과 달리 만옥은 당당했고 어떤 의미에선 뻔뻔했다. 만옥은 N그룹과 걸그룹의 합동무대를 볼 때, 저건 일일 뿐이라며 애써 웃고 있는 다른 팬들의 옆에서 구겨지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만옥은 N그룹에게 접근할 수 있는 여자라면 그 상대가 누구건 언제나 경계했다. 활동기가 겹친 걸그룹은 물론이고 코디나 회사 직원도 관찰 대상이 되었다(여기가 만옥의 관찰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만옥은 몇 개의 백스테이지 영상을 분석해, 유독 M의 화장을 자주 수정해주는 코디네이터 이름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녀의 SNS 계정을 염탐한 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아냈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만옥의 질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멤버들의 사진을 찍어 트위터 등에 올리는 팬들은, M이 그들의 렌즈를 자주 봐준다는 것만으로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나는 만옥이 M을 토닥이고 있던 멤버 B에게 손 떼, 손 떼,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당황했던 적도 있다. -P.56

(만옥의 말) 가끔 무엇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나는 두려웠어요. 겁이 나서, 몇 번이고 그들을 따라다니는 일을 그만두려고 했지요. 그러나 기다림을 보상해주는 실재, 몇 번을 보아도 신기하고, 언어로 설명되길 거부하는 그 모습, 그의 그림자나 그의 그림자로 착각한 것까지도 놀랍게 만들어주는 그 실재의 힘을 나는 이미 알아버리고 만 거지요. 현장을 다니게 된 이후로 나는 사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졌어요. 그가 좋아한다고 말한 이후, 나는 거리에 벚꽃나무가 그렇게 만다는 것을, 산들바람이 그렇게 자주 분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요.p.62

그러나 만옥이 환호한 것은 언제나 실재 그 자체였기에, 여기서 나와 만옥 사이에 건너지 못할 강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가까이서 오래 실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내가 점차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면, 만옥은 멤버들이 점만하게 보이더라도 언제나 실재를 택했다. 내가 출석 체크 시간에 늦어 뒷좌석에 앉고 욕을 했던 것과 달리 만옥은 아무리 무대와 거리가 멀어도 멤버들이 인식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순수하게 감탄을 했다. 때로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여기, 마시는 숨 어딘가에 멤버들이 뱉은 숨이 있을 거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그 기묘한 순수성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p.66.

 

가끔 TV에서 N그룹을 볼 때가 있다. 예전엔 별 관심 없었던 다른 그룹이 나오는 건 보게 되는 것과 달리, 이상하게 N그룹이 나오면 금방 채널을 돌리게 된다. 내가 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언어를 -특히 M에게-짊어지게 해서일까. 아니면 그때 그 말로는 차마 담지 못했던 모습이 변했을까봐 두려워서일까. 더이상 멤버들을 생각할 때 애틋하지도, 가슴 저미지도 않지만 그렇다. 그들을, 확인할 자신이 없다. 사랑하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괴로워했다. 그랬기에 만옥의 얘기처럼 어떤 말로도 그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어에 그들을 가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몇 번이나 그들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들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고 그것이 실패하는 순간의 감미로움에 취했다. 한마디로 정말 병에 걸린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새삼스레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대화가 불가능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뭘까? 멤버들과 나 사이에 소통은 없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일방적인 시선뿐.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믿었고, 교환도 환불도 불가능할 정도로 멋대로 주물러버렸다. 그렇게 내가 남긴 지문과 생채기를 생각한다. 미묘한 죄의식과 더불어 그걸 남길 수밖에 없던 나의 무능함에 우울해진다. p.67

나는 만옥을 만날 때마다 굴뚝 청소를 하고도 세수를 하지 않은 우화 속 소년들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만옥과 나는 끊임없이 얼굴에 덧칠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는데, 그건 불균형할지라도 ‘오빠’와 내가 어떤 관계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순간이나마 우리의 연인이었다. 선팅된 차에 올라타 가버리는 연인, 창문을 열어주지 않는 연인. 그들을 위해 우리는 머리를 빗고 화장을 고쳤다. 그 결과 누가 보면 세게 맞은 것 같은 얼굴을 갖게 되었음에도.-.68

계속되는 반복 속에서 우리는 굶주린 자가 음식 이름을 외는 것처럼 사랑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기다리다가 기다림 자체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처럼 지치지 않았다. 그 속에서 나는 안온함을 느꼈다. 그 안온함을 뒤로한 채, 어느 순간 나의 사랑은 끝이 났다. 다른 모든 사랑처럼 이 사랑에도 갈무리의 시간이 온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또는 말하길 꺼려 하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에 빠진 순간처럼 유쾌하지도 않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기록을 남겨보자면 그것은 만옥과 만난 마지막 밤의 일이었다.

그날은 10월 말답지 않게 높은 기온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추워진 하루였다. 여느 때와 같이 우리는 퇴근하는 멤버들을 보기 위해 방송국의 불이 다 꺼질 때까지-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 안 나오는 건가 싶게-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 돌아오는 길, 이미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다. 텅 빈 사거리에서 나는 가짜 눈을 뿌리며 달려가는 차를 보았고 영화 촬영중이라는 걸 알았다. 흰 조명을 밝히며, 몇몇의 스태프를 태우고 눈을 뿌리는 그 차가 어딘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문득 내가 있어야 할 곳보다 훨씬 먼 곳에 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나는 그 차를 따라 달렸다. 가만히 서 있는 만옥을 뒤로한 채 “영화다!영화다!”라고 소리쳤다. 무척 추워서 손끝이 굳을 정도의 날씨였다. 얼마 뒤면 진짜 눈이 내릴 터였다. 나는 길가에 늘어선 아파트를 보다가 저 중 어느 하나라도 내 집이길 간절하게 바라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중략)

그걸 마지막으로 나는 N 그룹을 보러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만옥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날 이후 만옥에게선 더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세계의 프로였으므로, 어쩌면 나보다 내 마음의 변화를 잘 알아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나는 사랑하길 포기한 걸까. 기다림에 지쳐서? 아니다 나는 기다림이 좋았다…… 나는 그들을 알게 된 이후 매 순간이 기다림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문장을 쓰며 그 순간을 간신히 버티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 고통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포기했던 걸까?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고통이 좋았고, 어떤 면에선 그것을 자발적으로 원한 사람이었다. 불확실한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보다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사랑을 포기한 것은 그날 거대한 신도시의 건물 사이를 돌다가, 막차를 놓칠까 반쯤 뛰다가, 명목상 심어둔 것처럼 드문드문 떨어져 서 있던 가로등 아래에서 흩날리는 가짜 눈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때 코트 자락을 너무 세게 털어서, 무언가 같이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p.71

 

 

2부 – 만옥의 이야기

 

그의 이름은 민규.
옥돌 민자에 별 이름 규 자를 쓰는 민규.
처음 듣는 순간 나는 구슬 같은 이름이구나, 했다.
아가트와 프레가트의 각운처럼 멋진 이름이구나, 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민규를 불렀다. ‘나의 천사’나 ‘내 사랑’ 유의 고전적인 애칭으로 불렀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민규, 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 이름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우리는 대개 그를 밍구로, 입술을 비죽 내밀고 깊을 때는 밍규, 친밀하게 부르고 싶을 때는 민구, 작은 카나리아처럼 부르고 싶을 때는 밍꾸라고 했다. 때로는 키스를 덧붙여 민규우, 목을 조르는 것처럼 밍꾸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도 불렀다. 민귺. 귺, 혀가 말리는 그 글자를 볼 때마다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은 거대한 반지를 끼고 있고 그걸로 사람들의 심장을 내리친다. 그걸 좋다고 할 순 없겠지만 어쩐지 감미로운 기분. 민귺, 이라고 할 때마다 나는 호두씨가 걸려 기도가 죄이는 느낌을 받았다. 숨이 막힌다.p.81

 

사랑에 빠지는 게 뭐가 지겨운 일인지 나는 생각한다. 지겹지 않다. 근래에 들어 나는 가능한 최대치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그를 두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사전녹화가 있는 날, 발걸음이 가볍다.
가을이 좋다. 여름이나 겨울과는 달리 가을엔 밖에서 기다려도 춥지도, 덥지도 않아 좋다. 여름볕에 오래 앉아 있으면 직사광선이 머리를 뚫고 들어온다. 대뇌피질이 끓어오르고 누군가 벌레를 손톱으로 눌러 죽이는 것처럼 정수리가 아프다. 익숙해지지 않는 땀냄새가 곤혹스럽다. 여름의 기다림이 부패하는 죽음이라면 겨울의 기다림은 건조한 죽음이다. 겨울의 기다림은 고통에서 시작해 잠깐의 심정지로 이어진다. 방광을 깨끗이 비운 채 우리는 다음 생을 희망하며 얼어간다. 다음 생엔 민규의 엄마로 태어나길, 사촌으로 태어나길, 스타일리스트, 여자친구, 민규의 무엇으로라도 태어날 수 있길 바라면서.p.90

밍구야아
우워워워.

네가 살짝 미소지었다. 멀리 있었지만 봉긋이 솟는 광대뼈를, 하얀 이를 나는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나를 향한 인사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땐 뇌 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불똥에 화상이라도 입을까 겁내는 사람처럼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싶어진다. 만화 속에 나오는 사람처럼 m과 나는 두 발을 마구 굴렀다.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듯 힘껏 달렸다.p.90

m과 나는 맨 뒤에 앉아 버스가 가득찰 정도로 많은 말을 내뱉었다. 말에 형체가 있다면 버스가 전복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기다리고, 만나고, 흥분에 찬 상태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매일매일 반복되는데 어째서 지치지 않는 건지. 아니 지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매번 신기하기까지 한 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신기하니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래서 매번 새로운 걸까.p.9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행복은 무너졌다. 어린 시절, 장난감 부엌에서 국자와 접시 몇 개가 사라졌던 것처럼 쉽게 망가졌다. 마지막 순위 발표 때 허리를 굽히며 걸어 나오는 너를 볼 때까진 좋았다. 네가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 때도 좋았다. 그런데 네가 왼쪽과 오른쪽의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다 옆에 있던 여자와 부딪혀 사과를 할 때부터 기분이 나빠졌다. 두 뺨을 올리며 얼굴을 구기듯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빠졌다. 너는 그저 예의를 차린 것뿐인데도 그랬다. 결정적으로 하필, 일곱명이나 되는 멤버 중 네가 제일 가장자리에 서서, 그 걸그룹 멤버와 어깨를 맞대고 있어서 기분 나빴다. 너와 그 여자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겐 그 행동이 외려 더 의심스러웠다. 그 여자를 붙잡고 당신의 표정이 대체 뭐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은 가장 낮은 곳, 추락한 죄인들이 손을 뻗었지만 누구도 거미줄 하나 내려주지 않았다. 죄인들은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알고 있는 천사의 이름을 외웠다. 제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가장 간절하다고 몸부림쳤다. 그 사이에 끼어 나는 깊은 환멸을 느꼈다. 옆 사람의 검은 반팔 티가 눅눅한 것이, 무대와의 높이 차이가 지나치게 큰 것이, 네가 아닌 다른 이의 팔과 맞대고 있는 내 살갗이 혐오스러웠다. 열린 땀구멍이 혐오스러웠다.

무대 위의 저들에겐 구원의 여지가 있다. 저 여자들, 그러니까 짧은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날리는 이들은 원한다면 언제나 너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 최상의 상태, 비싼 피부과와 클리닉이 가꿔 준 가장 예쁜 모습으로 말을 걸겠지. 늙은 시계공이 만든 것처럼 정교한 눈동자를, 온갖 더러움으로부터 너를 보호하는 속눈썹을 보면서 숨을 뱉겠지. 나는 너를 함부로 쳐다볼 눈과 네 숨결이 닿을 저 피부를 저주했다. p.94

돈을 벌어야 한다. 나에겐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빌자면, 나는 사인회에 가는 게 소원이다. 옆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인회에 가는 게 소원이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소원이라고 할 만큼은 어렵다. 사인회를 할 때마다 백 명의 당첨자를 뽑는다. 나흘 동안 평균적으로 칠천 장의 CD가 팔린다. 계산해보면 칠십 장은 사야 안전하게 뽑힐 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 그렇다고 칠십 장을 살 필요는 없고. 한 사십 장 정도는 사야 하는 것 같다.

그럴 돈이 있다면 민규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다. CD 한 장에 만삼천원, 사십 장이면 오십이만원.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은 돈. 선물을 산다면 좋은 것 하나와 작은 것 하나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박복한 사람이라도 한 번은 써볼 만한 액수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부질없다. 나에겐 그만큼의 돈이 없으니까. 돈이 없으니까.p.97

 

민규를 보지 못하는 날은 생각이 많아진다.

…(중략)…
이런 생각을 오래 한 날 나는 꿈을 꿨다.
너를 날려보내려고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꿈이었다.
나는 무능력하고 너무 작아서 마녀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했다.
씨발, 사인회 당첨된 년들처럼 손깍지 낀 것이 기뻐
지문이라도 훔쳐갈 것처럼 샅샅이 너의 손바닥을 느끼다가 그만 떠나보낼 시간을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날아가지 못한 네가 엉엉 울어서 나도 같이 울었다.
꿈속에서 나는 좋아서 울고 너는 슬퍼서 울었다.
나는 힝힝, 하고 너는 엉엉, 하던 꿈.
맞잡은 손으로 우리의 피와 살이 얽히길 바라던 꿈.  P.99

 

네가 해외로 나가는 게 싫지만은 않다. 엊그제, 네가 이곳을 떠나고 나자 오히려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이력서를 넣고 전화 온 두 곳의 면접을 봤다. 오랜만에 머리를 써서 책도 읽었다. 네가 여기 있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너는 어제 서울로 돌아왔다. 닿을 만한 거리로 돌아오면서 괴로움도 함께 가져왔다. 오늘 너는 선릉역의 고깃집엘 갔다. 멤버들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데, 너 혼자 맨얼굴로 있는 것이 사진에 찍혔다. 너는 젓가락을 들고 뜨거운 고기를 입안에 밀어넣고 있었다. 왼손과 내리깐 눈으로는 테이블을 더듬고 있었다. 컵을 찾는 듯했다. 나는 그게 억울했다. 너에게 물을 건네줄 수 없는 것이, 테이블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억울했다. 누가 나를 막은 것처럼 그랬다. p.100

나는 피곤했고 할 일이 많았다. 돈을 많이 벌어 남향에 부엌이 분리된 집으로 이사하고 싶었고, 더 더워지기 전에 샌들을 사고 싶었다. 커피를 고를 때 오백원 차이로 망설이고 싶지 않았고 늘어난 속옷도 싫었다. 더이상 발을 들이면 모든 게 엉망이 될 게 뻔했다. 그런 그걸 알면서도 나는 너를 보러 갔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수십번도 더 가본 광장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리길 바라면서. p.108

 

음악방송에선 모든 무대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순위 발표를 했다. 나는 그때 네가 다시 나올 걸 알았기에, 그 찰나의 순간이라도 너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계속 전진했다. 사람들을 밀고 틈새로 끼어들며 스피커 근처, 정말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곳까지 나아갔다.
그렇게 무대 가까이, 인구밀도가 아주 높은 곳에 도달하자 그간 잊고 있었던 괴로움이 다시 상기됐다. 행사를 다닐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거대한 스피커의 진동이나 땀냄새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너와 같은 무대에 동료라는 이름으로 서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다. 내가 너를 보기 위해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것과 달리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할 때면 언제라도 너를 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내가 마치 그들을 보길 간절히 원한 것처럼 아래에서 올려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했다.

마지막 순서가 끝나고, 순위 발표 시간에 네가 뛰어나왔다. 운이 나쁘게도 너는 내가 있는 쪽과 반대쪽 맨 끝에 서게 됐다. 알고 보니 그쪽에 팬석이 있었다고 했다. 너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주 많이 손을 흔들어주었고 손가락으로 작게 하트를 만들거나 윙크를 보냈다. 들어가는 순간까지 허리를 굽히고 반복해 인사하기를 잊지 않앗다. 내 쪽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날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아주 잠깐의 순간이지만 진실로,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109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고 나는 나를 감당하지 못한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 중에 이런 말을 한 친구가 있다. 나는 평생을 앓은 사람. 그때마다 사랑하는 일에 대해,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사람이라, 언제나 주위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멀어지기 전 그 친구는 나에게 네가 사랑하는 건지 괴로워하는 건지 헷갈린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그만두지 못할 거면 즐겁게라도 해. 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하자! 그러나 나는 천성적으로 그게 불가능했다. 어떻게 즐겁게 해? 보지 못하는 날엔 눈앞에 없어 괴롭고, 보는 날엔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 괴로운데. 그를 웃게 할 수도 없고 내 이름을 들려줄 수도 없는데. 고양이가 집을 나간 뒤 동물을 키울 수 없게 됐다는 걸, 통근 길엔 음악보다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는 걸 알려줄 수 없는데. 기울어진 떡볶이집에서 그릇에 담긴 어묵 국물을 수평으로 맞추려고 한 적이 있는지, 멀미가 심해 모과 냄새만 맡고도 구역질을 한 적이 있는지, 꿈속에서 다리 한 짝을 잃어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더듬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답을 들을 수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해? 어떻게 즐겁게 할 수 있어? p.110

 

내가 놀란 건 네가 카메라에 눈을 맞추고 있어서였다. 그 먼 거리에서, 우연일지라도 카메라를 보고 있는 네가 나를 놀라게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끼는 존재가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네 손톱 길이에, 추운 날 드러난 발목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너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너에게 자주 선물을 주는 사람, 너의 사진을 예쁘게 찍어서 올려주는 사람,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비공개 행사든 해외든 상관없이 쫓아다니는 사람이라면 너는 그것이 너를 향한 강한 애정의 증거라고 받아들이고 다른 팬보다 그들을 좀더 소중히 여길 터였다. 너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 그들의 카메라를 한번 더 쳐다볼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았고 내가 그 중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견뎠다. 나는 구석에 앉은 얌전한 학생. 손을 들어 주의를 환기하기보단 조용히 앉아 나를 들키길 희망했다. 그러나 기대는 배반되기 마련이고, 나에겐 방과후 면담도, 하굣길의 우연한 만남도 없었다. p.113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가 멈출 때까지 돌을 던지고 싶었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 신발 밑창을 바닥에 문지르고도 싶었다. 하지만 선택지는 하나. 너를 계속해서 보는 것 외엔, 나의 무력을 확인하는 것 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지금 뒤돌아서건 아니건 천사가 한번 핥은 듯 깨끗한 눈동자가 나를 쫓아다닐 거란 걸 알았다. 이런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네가 나를 태우고 말 거라는 예감.

너를 알게 된 뒤로 나는 매번 이랬다. 모든 사람을 질투하고 의심했다….(중략)… 너는 나의 것인데 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너를 사랑하고 있을까. p.116

다른 멤버들은 웃어주는데, 오늘따라 너는 어두운 얼굴이다. 손을 흔들어주지도 눈을 맞추지도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앉아 있다. 기가 죽은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멈췄다. 뭐야, 오늘 왜 이래. 몇몇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중얼대는 것도 들렸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발 떨어져 차가 출발하는 것만 지켜 봤다.

너는 아주 피곤하고 손이 저릴 것이다. 너는 이미 많은 돈을 지불하고, 운을 걸고, 충분히 너를 위해 무언가를 바친, 분명 나보다 아주 많이 바친 사람을 위해 시간을 쓰고 왔다. 그들은 많은 것을, 이를테면 손으로 하트를 그려달라고, 손깍지를 껴달라고, 애교를 부려달라고 요구했을 것이고 너는 일일이 그것에 응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피곤하다,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피로, 넘치는 사랑을 받을 뿐인데도 느끼는 피로를 나는 이해했다. 너의 침묵을 이해했다.
나는 기다림이 습관이 된 사람이니 괜찮다. 오늘따라 울적한 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다리다보면 나에게도 너와 얘기할 순간이 올 테니까. 그때가 되면 나는 무슨말을 할까? 사인회에 응모할 때마다 나는 너에게 할 말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인회에 떨어지면 그 말도 우수수 잊어버린다. 하고 싶은 말이 매일 바뀌기 때문이다. 너의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그건 그날이 돼봐야 하는 일. p.117

오늘따라 네가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유리벽 너머의 네가 손을 흔들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나는 인사를 받으면서 잠시 슬퍼졌다. 민규야, 너는 왜 말이 없고 멀리 있어?

그러나 내가 바란 건 답이 아니다. 너에게 묻는 모든 것은 의문이 아닌 투정. 네가 유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라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p.128

영화 찍는다! 영화! 만옥씨 보셨어요? 나도 웃으며 m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
밤이 깊었고 얼마 뒤면 진짜 눈이 내릴 터였다. 그런 흩날리는 가짜 눈을 맞으며 나는 아름다운 것엔 언제나 속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차갑지 않고 아름답다면 그게 더 나은 건지도 몰랐다.p.128

 

3부 – 만옥을 짝사랑한 남자 민규의 이야기

만옥은 만 가지 옥이라는 뜻. 다른 한자를 쓴다면 가득찬 보배라는 뜻도 넘쳐흐르는 보배라는 뜻도 돼서, 아직도 만옥, 이라고 부르면 먼저 작고 예쁜 구슬이 생각난다. 그 구슬이 바닥으로 떨어져 주울 수 없는 곳으로 굴러가는 것을 본다 그날 너는 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p.135

네가 죽은 뒤 내겐 많은 것이 남지 않았다. 너의 책과 뜯고 난 뒤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CD는 주변 사람들이 가져갔다. 이불과 옷가지는 채웠고, 식기는 땅에 묻었다. 그러고도 남은 건 용달차가 실어가고, 나의 몫은 훔치듯 가져온 몇 통의 편지와 코르덴 스커트뿐이다. 네가 죽을 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서 나는 조금 어지러웠다. p.135

너는 일생을 사랑하는 걸 취미로 삼은 사람이었다. 본 영화도 읽은 책도 들은 음악도 많지 않았지만 사랑만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했다. 어느 날 고통에 못 이긴 듯 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더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병이야. 그러나 내가 너의 병이 된 적은 없었다. 너의 병이 나만은 비껴갔다. 나는 이것이 두고두고 서운했다. p.138

나는 내가 알지 못한 너를 알길 원했다. 내가 m과 만난 것도 그래서다. m의 이름을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방송국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혹시 만옥을 아세요,라고 물을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에겐 내가 모르는 시절에 너를 알고 있는 m의 이름이 있었다. p.138

만옥씨는 만약, 민규가 연애를 한다고 해도 자기가 말릴 수 없는 입장이란 걸 알았고, 상대방이 누군지 알고 있다면 그녀의 생일에 선물을 보낼 사람이었어요, 그게 민규의 행복이라면요. 나는 그런 만옥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만옥씨는, 만약 민규가 연애한다면 상대방의 인형을 만들어 바늘을 꽂을 사람이기도 했어요. 민규를 향해서도 늘 네가 행복했으면 됐어, 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그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 그래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때쯤, 그제야 나 혼자 그를 가졌다고 안심할 사람이었다는 거. 저는 가끔 그런 느낌을 만옥씨에게 받았고, 그 때마다 소름끼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심정을 완전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어요. 왜냐면 저도 때론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게 이상하다는 건 알았고, 언제라도 그 맨얼굴이 드러날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주의하곤 했으니까,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나는 이해한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네, 제가 그랬네요. 만옥을 생각할 때마다 제가 몇 번이고 그랬네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p.139

(m의 말) 가끔 팬들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해요. 각자 다른 사람들이 뭉쳐 있는 건데 왜 같은 사람처럼 보일까. 그러니까, 멤버들을 기다릴 때 우리는 언제나 평균치의 인간이지, 개개인이 되지 못하잖아요. 참 이상해요. 우리는 내가 가장 그 멤버를 사랑한다! 이런 걸 주장하고, 팬들 안에서도 최고가 되고 싶어하고, 늘 멤버들의 눈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런 마음이 강할수록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게. 그저 누군가를 위해 하루를 아낌없이 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게. p.176

그날을 끝으로 나는 더이상 m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마 m도 같은 심정일거라 생각한다. 만남의 목적은 성취됐다. 나는 그간 네가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모습을 m을 통해서, 그녀의 기억과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네가 내게서 멀어지는 걸, 너무 행복하게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걸 알았다. 마치 처음 너의 죽음을 들었을 때처럼, 죽는 순간, 그 이전 순간도 어느 한순간도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너의 삶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p.181

일본 진출을 하고 돌아온 N그룹이 새 앨범 발매 기념으로 팬사인회를 했다.

첫 사인회는 잠실. 서른 장을 샀다. 떨어졌다. 두번째는 목동. 서른 장을 샀다. 떨어졌다. 세번째는 종로. 이번에는 마흔 장을 샀다. 됐다. 꼭 백 장을 채우고 나니까 백일기도, 백일치성. 이런 말이 떠올랐다. …(중략)…

팬사인회가 진행되는 비공개 홀은 생각보다 작았다. 나도 모르게 바다 생물로 변해버린 기분, 벌써부터 무릎에 파랗게 멍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려들은 너무 아름다웠고, 아름답지 못한 이들은 아름다우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불안을 감추고 있는 사람들과 여유로운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 옆사람이 물었다. 남팬이세요? 처음 뵙는 거 같은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 사람이 다시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오신 거 보니까 되게 좋아하시나보다. 누구 제일 좋아하세요? 나는 너의 목소리를 빌렸다. 너의 간절함으로 민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갸아악, 작게 소리지른 다음에 나도 민규 제일 좋아하는데, 라며 웃었다…. (중략)…

 

m의 말대로 참 다정한 사람들. 이 사람들과 함께 기다릴 때 너는 다정함을 느꼈을까, 아니면 질투심을 느꼈을까. 나는 부디 네가 이들에게서 사랑을 느꼈기를, 지금 내 앞의 여자처럼 동질감에 즐거워 작은 비명을 질렀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너무 슬프니까. 내 앞에선 언제나 우는 듯 찡그린 얼굴의 너였으니까.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사인을 받기 위해 앨범을 내밀었다. 처음 본 그는 이렇게 다른 사람이 같은 이름을 가져도 되는 것인가, 의문이 들 정도여서 나는 문득 누구에게인지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나는 낮게 몸을 숙였다. 레스토랑의 직원처럼, 기도하는 사람처럼 무릎을 꿇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예요?
만옥이요.
만옥.
만옥이라고 적어주세요.

만옥, 이라고 적어달라고 내가 말했다. p.184

…………………………………………………………………………………………

 

시작할 땐 이렇게 많이 받아적게 될지 몰랐는데 생각보다 많아졌다.
하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글이 워낙 섬광처럼 예민하고 좋아서.

나는 m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누구나 어느 팬이나 마음 속에 숨기고 싶은 만옥의 일부가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만옥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했다. 심사위원들도 그 자학적인 사랑의 화염에 불타 죽어버린 만옥의 이야기가 더 매혹적이라고 썼더라. m의 이야기가 기억, 기록, 실재에 대한 다소 관념적인 이야기라면, 만옥의 이야기는 좀더 생생하다. 한편 가짜 눈을 맞던 날 갑자기 무언가 떨어져나간 듯 팬심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m의 이야기에선 가슴이 허하게 시려왔다. 사랑이 어느날 그렇게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화가 불가능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스타와 팬의 관계에서는 노랫말과 음악 속의 그와 만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교감이라 믿고 있지만, 실은 이것은 몸부림이다. 진실은, 대화가 불가능한 인간을 사랑하는 외로움이 사람을 삼켜버릴 수도 있다는 거다. 내리는 가짜 눈을 털어내다가 갑자기 사랑이 끝나버린 m을 이해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만옥을 이해한다. 같은 가짜눈을 맞으면서도 ‘아름다운 것에는 언제나 속아도 좋다’고 하는 만옥.

한편 이런 문장들을 싫어할 유형의 팬들도  있을 것이다. 나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힘든 부류이지만 내가 경탄해 마지 않는 부류. 하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는 없는 유형의 사람들.

 

Comments on this post

  1.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6 at 오전 10:19

    m의 이야기 첫부분에서, ‘나는 점차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되어갔다’이 부분이 지금 내 상태네. 나 사람들이랑 있으면 할 말이 없거든.
    나는 m일까, 만옥일까, 두가지 성향 다 아닐까? 그냥 나는 성규의 성향이라는 생각이 드네. 좀 겁많고 츤츤거리고, 사랑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랑이 달아날거같고.. 뭐 사실 이건 다 비겁한 이유이고, 성규는 어떤놈인지 잘 모르는게 사실이고..난 m과 만옥 두명의 경지 모두 두려워서 안 빠지려고 발악하는 팬질? ㅋㅋ 이거 역시 자학적이니 난 본질적으로는 만옥이에 가까운가.
    교리문답, 딱 저말이 맞다ㅋㅋ 종교전쟁 막 그런거도 떠오르고..ㅋㅋㅋ

    근데..민규 얘기가 젤 슬프다. 눈물난다.

  2. wisepaper said on 2016-09-26 at 오전 11:03

    그 남자애 얘기가 젤 슬픈가요.ㅠㅠ 언니가 그렇게 말하니 새삼스럽게 저도 거기가 젤 슬프네요. 가여운 남자애야.. 만옥이 한 번도 자기를 인생의 그 어떤 순간에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그 남자의 이야기는, 전 반대로 아이돌 민규를 떠올리게도 돼요. 아이돌들이 ‘팬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불가능하잖아요. 단지 덩어리를 사랑할 수 있을 뿐. 그러므로 그들은 단 한 번도 팬을 사랑하지 않은 셈이 돼요.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는 없는 관계에요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우린 두 가지 성향 다 섞여 있겠죠. 제 가슴속에도 m도 있고 만옥의 일부도 있으니까. 전 어제 사인회에서 팬들과 장난하며 웃고 있는 우현이 사진을 트위터에서 쭉 보는데 문득, 내가 여기서 뭐하는 짓인가. 저 세상속은 나와는 다른 세상 같은데, 도대체 내가 여기 왜 끼어있는 걸까 하는 생각. 내가 끼어 있지 말아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이러다 또 제가 생각이 확 바뀝니다. 무언가에 빠진 사람은 원래 천국과 지옥을 매일같이 오가는 법. 언닌 지금 사실 아직 저 단계까지 안 간 게, 냉정하게 말하면 그만큼의 노력을 쓰지 않아서거든요. 언닌 가지 마세요……….

    •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6 at 오전 11:20

      응..난 그단계에 가는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람이야. 남편이 짠돌이에 질투쟁이라서 외간남자, 특히 성규처럼 젊고 파릇파릇한 놈에게 돈쓰는거 원치않거든. 아 뭐 콘서트나 뮤지컬 정도야 보내주겠지만ㅋㅋ
      그래..만약 나도 너처럼 에너지를 많이 쏟아부었다면 그랬을거야. 심한 고통에 빠졌을거야. 근데 왠지 우현이라서 더 그럴거같아. 팬과 직접적인 소통, 직접적인 사랑에 빠질수 있다는 환상을 안겨주는 우현이이기에..더더욱 그럴것도같아.

      그리고 민규 얘기가 슬픈건..그토록 만옥이 원하던 싸인회였잖아. 만옥 이름으로 싸인받는 그 상황이 너무 아리고 슬퍼. 아..설명할수없는 눈물이 나와.

  3. wisepaper said on 2016-09-26 at 오전 11:38

    만옥 이름으로 사인받는 거.. 저도 슬프네요….ㅠㅠㅠ

    언니가 저한테, 나였다면 심한 고통에 빠졌을 거란 말이 굉장히 위로가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연약해서 그런 게 아니라 누구라도 나 정도로 에너지를 썼으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게 제게 위안이 되거든요.. 근데 제 고통은 ‘내 개인적인 고통’이라기보단 보통명사로서의 ‘팬질’, 팬질 일반, 팬질 전체에 대한 고찰에서 오는 고통 같아요. 전 가끔 사인회나 공방 무대위 멤버들이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때 아득한 기분을 느끼거든요. 정말 거기까지 온 팬 개개인의 사정 – 그러니까 저 위의 돈없는 만옥 같은- 을 그 고맙다는 말이 얼마나 담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아닌 말들이죠 그 인사는. 아무것도 담지 않는 말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또 무대 위 아이돌이 그 말 외에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그게 그 위치의 한계인데. 그러니까 애초부터 이 사랑은 비대칭적이고 불균형한 사랑일 수밖에 없죠. 서로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서로의 삶을 들여다볼수도 없는데 거기에 사랑이란 말을 쓴다는게 저는 갑자기 너무 아려올 때가 있거든요. 전 그 본질적인 데서 고통이 와요. 단지 제 개인적인 것, 나한테 무슨 계가 안 떨어지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게 굉장히 비대칭적인 사랑이란 게. 그리고 그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게.. 제가 자꾸 본질을 생각하는 성향이니까 그런 거겠죠.

    .

  4. wisepaper said on 2016-09-26 at 오후 1:20

    근데 저 짝사랑하는 남자애 이름이 왜 아이돌 민규랑 똑같을까.. 혹시 저 남자애는 한편으로는 아이돌 민규를 상징하는 거 아닐까 싶네요 갑자기..ㅎㅎ 그 남자애가 하는 말이 “만옥이 너는 평생 단 한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거든요. 어쩌면 팬의 사랑이 평생 단 한번도 진짜 인간 민규를 사랑하진 않은 게 아닐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이미지를 좋아하는 거잖아요 사실… 그게 곧 민규 자체는 아닐 테니까. 만옥은 미친듯이 사랑했지만 사실 아이돌 민규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거…..;;;;; 망상인가요. ㅎㅎㅎㅎㅎ

    그리고 전 사실 마이우현하면서 언니동생친구들이 생기고 어떤 소통이 될 때.. 그 때가 이 고통이 치유되는 순간 같아요. 제가 동생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또 그런 것들로부터 채워지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그니까 내가 우현이를 파고들어가면 공허와 고통에 부딪치지만 그로 인해 파생된 관계를 생각하면 분명 얻은 게 있거든요.

    •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6 at 오후 3:07

      음..나도 왜 이름이 둘다 민규일까 계속 생각해봤어. 둘다 외로운 존재이기도 하고, 스타 민규는 팬질 당하고, 일반인 민규는 일반인을 팬질하고..이게 뭘까. 참 묘한 설정이야. 암튼 만옥이는 민규라는 이름과는 닿을 수 없는 운명이네. 니말대로 두명 다 실질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존재이기도 하고..암튼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일 것같아. 영화 소재로도 다뤄졌으면 하네. 주인공은 남우현? ㅋㅋ 딱이다 딱..막 하트 날려서 팬들한테 망상 키우고ㅋㅋㅋ 아 농담이야. ㅋㅋ
      스타를 향한 이 감정은 그냥 딱 ‘유사’연애, 아직은 이말밖에는 생각 안 나네. 인간끼리 하는 사랑의 본질과는 다른, 또다른 본질?
      스타들이 팬들한테 사랑한다고 할땐, 그냥 고마움의 마음같아. 우리의 사랑과 다르겠지. 먼저 한 사랑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보답하는 사랑, 우리의 마음에 대해 같은 형식으로 ‘사랑해’ 이렇게 말해주는거..먼저 우리의 마음이 없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사랑.
      근데 일반인 민규가 느끼는 허무함이나 스타 민규가 느끼는 허무함이 비슷한거 아닐까 생각도 들고.. 즉, 팬이 느끼는 허무함과 현타만큼, 스타도 그만큼의 허무함과 현타를 느끼지 않을까하는..뭔지는 내가 스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나 성규가 싸인회에서 했다는 말 중 너무 서운한게 있어. 팬들이 막 이것저것 오글거리는 포즈 요구하니까 성규가 실실 웃으면서 팬들한테, “여러분들 다른 스타 팬싸인회 가서도 이러세요?” 헐..이건 정말 규수니들 맘을 너무 몰라주는 발언 아님? 다른 규수니들은 이말 듣고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난 서운하던데(비록 팬싸에 안갔지만, 팬들이 그렇게 아무 스타나 다 좋아서 여기저기 따라다닌다고 생각하나..아 너무 몰라준다 이 답답아~). 이거 내가 과민반응인가?

  5. wisepaper said on 2016-09-26 at 오후 3:42

    그러네요. 두 명의 민규는 둘다 실질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존재일 수도..ㅠㅠ

    ‘유사’연애. 정말 독특한 연애의 한 방식인데 이게 소설이든 영화든 그어떤 예술작품의 소재로 충분히 고찰되지 않았다는 게 전 신기해요. 이제 이 소설을 시작으로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ㅎㅎ 고찰해야 할 부분이 되게 많아요.

    네. 저는 우현이 같은 스타가 느낄 공허함과 현타가 아주 클 거 같아요. 팬들을 만나긴 만나지만 실체도 맥락도 알 수 없는 존재들이잖아요.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을 거 같고 허기질 거 같고, 그리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실질이 빠진 사랑. 되게 허할 거 같아요. 근데 그럼에도 팬들의 짝사랑도 너무나 슬픈 게, 스타는 ‘특정 누구’를 사랑해서 슬픈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팬들이란 존재는, 특정 누구를 사랑하는데 만날 수도 소통할 수도 답을 들을 수도 없잖아요.. 저 책에선, 사랑하지만 어떤 식으로도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팬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상대와 관계는 맺는 일반적인 짝사랑보다 슬프다는 문장이 있어요. 아무튼 그래도 저는 스타의 공허 또한 엄청 클 거 같고, 쉬운 일은 아닐 거 같아요.

    성규 얘기는, 언니 맘 전 무슨 뜻인지 알거 같구요. 근데요. 사인회 가고 공방 가고 오프에서 열심인 팬들 중에 의외로 그런 팬질 자체, 아이돌 팬질 자체를 즐겨서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덕질 대상은 계속 바뀌는 거. 그래서 아이돌 산업 또한 특정 풀 안에서 계속 돌아간다잖아요. A를 좋아했던 팬들이 B로 옮겨 가고 돌고 돈다고.. 그런 의미에서 성규 말은 맞아요. 그리고 한편으로 성규의 츤데레 같은 감성을 바탕으로 궁예해볼 땐 저 짧은 발언 속에서 성규가 팬들에게 투정을 하고 있네요. 우리만, 나만 바라봐주지 않고 니네들은 다른 애들한테도 가지? 하는 투정.. 성규맘이 읽히는 거 같아서 귀엽기도 짠하기도..

    •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6 at 오후 4:07

      맞아, 그러고보니 여기 중국팬들이 특히 아이돌 콘서트나 행사면 아무 스타나 무조건 따라다니고 그러네.
      그럼 성규 눈에는 일편단심 누나팬들은 극소수로 느껴지고(이런 누나팬들마저 언젠가는 무섭게 싸늘해질) 이스타 저스타 옮겨다니는 아이돌팬들이 팬의 대다수로 느껴질수도 있겠다. 이 생각하니 디게 슬프네. 이건 성규 입장에서도 비참한거고 수니 입장에서도 비참한거고.
      성규가 전에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팬에 대해 물어봤을때, 아주 모든 팬들 들으라는 듯이 “저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영원히 지지해줄거라고, 규지지라는 분이 계세요.”라고 말한적 있음. 그리고 가장 용서할 수 없는게 뭐냐고 했더니 “나를 못믿는거요.”라고 했고.
      근데 이름은 또 왜 촌스럽게 만옥이야. 나이 많은 누나팬인걸 강조하다보니 촌스럽게 네이밍했나.
      근데..이 소설을 스타들이 본다면 제대로 알아줄까? 이렇게까지 자학적인 사랑이라는걸 그들은 모를거같아. 성규 말처럼, 그들에게 우리의 이미지는 그저 아무 스타나 확 뜨기만 하면 유행에 맞춰 따라다니는 사람들, 그러니 늘 그들은 불안감에 시달리겠지. 이런 자학적인 사랑의 감정을 안다 해도 이게 더 무서울거야. 가짜눈이 내리면 갑자기 싸늘해질 수 있는 이런 사랑을 그들에게 표현하면, 두려워질거같아.

  6.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6 at 오후 4:13

    그리고 그 구여친은 왜 유출했대? 이유가 있대? 걍 관종??

  7.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6 at 오후 4:37

    응. 나는 성규가 다른 여자랑 다정한 포즈로 있는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러나 성규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겠지. 다만 내가 상상만 안할뿐ㅠ
    그래도 나는 이미 성규 외에 딴남자가 있으니 성규가 연애하고 결혼해도 공평하다고 느끼지만, 성규만 바라보며 연애도 결혼도 안하는 수니들은 걱정이야. 나중에 성규 딴사람한테 어떻게 보낼까싶어서..딴남자랑 같이 사는 나도 성규 보내기 힘들텐데..
    암튼 그래서 난 공방이나 공항 등에 따라다니는 팬은 못된다. 거기서 다른 팬들 만나게 되어서 이런저런 내스타에 대한 사생활 얘기 하게 되는거 싫고 두렵고..어쩌면 난 만옥이와 똑같은데 다른 극에 있는 성향이겠지. 그러나 엔극과 에스극은 만나기 마련. 그걸 알기에 난 깊이 빠져들지 않는거야. ㅋㅋ
    나는 그냥 모니터 속의 성규만 사랑하련다. ㅋㅋㅋ

  8. wisepaper said on 2016-09-26 at 오후 4:46

    우현인 제가 혼자가 아니라 ornus랑 같이 커뮤 만들고 같이 콘서트 오고 그래서 되게 맘 편할거에요. ㅋㅋㅋ 혼자인 누나팬이 자기한테 그 정도까지 비싼 옷을 선물해주고 막 커뮤 만들고 한국까지 와서 콘서트 맨앞줄에 와있고 그럼 좀 ㅠㅠ 그러고보니 우현이가 ornus한테 어찌나 정중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고마워요” 했는지 제가 그 눈빛이 다 기억난다니까요. ㅎㅎ

    •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6 at 오후 5:10

      ㅋㅋ 그 정중한 눈빛 상상이 가. 우현이가 남팬을 대하는 모습은 어떨까..

  9. wisepaper said on 2016-09-26 at 오후 5:21

    저 소설이 참 소설이니까 가능한 적나라한 문장이지만 참 전 너무 와닿더라구요.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은 가장 낮은 곳, 추락한 죄인들이 손을 뻗었지만 누구도 거미줄 하나 내려주지 않았다. 죄인들은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알고 있는 천사의 이름을 외웠다. 제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가장 간절하다고 몸부림쳤다. 그 사이에 끼어 나는 깊은 환멸을 느꼈다.” 참 자학적인 문장이에요. 전 근데 이런데서 쾌감이 느껴져요 ㅎㅎㅎ 역시 병이야..

  10.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6 at 오후 9:35

    헐..지금 환상통 검색해보니 저자가 우현이보다 어리잖아?!!!!!! 젠장..부럽다 부러워. 누나팬 이모팬은 무슨..ㅋㅋㅋㅋㅋ 이름을 만옥이라고 했길래 디게 나이많은 줌마수니인가 반가웠더니 참나..ㅋㅋㅋㅋㅋ

    • wisepaper said on 2016-09-26 at 오후 11:39

      거기서 만옥이 좋아하는 아이돌은 미성년자에요. 그래서 나름 본인은 누나팬으로서 자괴감 느끼나보죠 ㅋㅋㅋ 나이차도 나이차지만 미성년자는 나이차 외에 또 뭔가 심란한 장벽을 느낄 테니까요. 언니 우린 그래도 같은 성인이잖아요;;;; 위로합시다. 위로가 안 된다……

      •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7 at 오전 12:32

        그래. 바다를 보고 위로한다.
        성규는 나랑 밤새 술마셔도 엄마한테 안 혼나는 나이지. 아, 그러면 성규엄마가 날 싫어하시긴 하겠다..아냐, 엄마 상관없이 성규가 날 술상대로 십분만 상대해줘도…..아 또 비참해..ㅋㅋㅋㅋㅋ

  11. wisepaper said on 2016-09-27 at 오전 12:09

    전 한편으론 스타도 팬의 맨얼굴, 진실을 봤으면 좋겠다는 맘도 있어요. 스타를 사랑하는 팬의 마음에 물론 항상 자학만 있는 건 아니고 산뜻하게 기쁘고 활력소가 되고 행복한 마음도 많고(저한테도 있구요), 그런 팬들도 많겠지만.. 많이 좋아하는 팬의 마음 한구석엔 결국 저렇게 고통스러운 자학이 있다는 거.

    •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7 at 오전 12:35

      나도 읽었으면 좋겠어. 근데 읽어도 제대로 알까? 에이 설마..이럴까?

  12.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7 at 오전 12:54

    갑자기 홈마들 마음도 궁금해지네. 그만두고 싶어도 고통스러워도 계속 하는 홈마들 있을까.
    그리고..환상통 저자가 저 주인공들을 ‘평균적인 팬들’로 설정했다잖아. 아마 니 주변 우수니들 외에 너같은 성향 가진 애들이 분명히 있을거같아.
    그리고,,난 니가 고통이 예측되더라도 불길에 뛰어든 용기에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느껴왔던것들, 그리고 앞으로 느낄 많은 것들, 분명히 니 인생에 큰 영향 미치는 자산(이것도 세속적 용어라 좀 그렇다만)이 되는 순간이 올 것 같아. 예를 들어 니가 소설가가 될수도..ㅋㅋ
    아니면, 우현이에게 쏟은 에너지에 대한 직접적 결과물을 얻을수도 있겠지. 박재범 팬덤이 느끼는 자부심 비슷하게..
    암튼 이런 결과물들이 아니다 하더라도, 너의 용기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

  13.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7 at 오전 1:11

    너도 프로의 길로 들어선거야.
    팬심은 힘들다가 불타다가 왔다갔다하겠지.
    글구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대한 나의 대답은 “are you ok?” ㅋㅋ 이거 사랑한다는 팬의 말에 성규가 대답했던거..ㅋㅋㅋ

    •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7 at 오전 1:46

      난 스타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내가 만들어낸 환상을 사랑하고 있고, 스타도 그걸 잘 알테니..그들은 사랑을 얻어내는게 업일 뿐이고. 비즈니스일 뿐이고. 스타를 사랑하는건 현실속 사랑과는 딴판이라는걸 처음부터 인정하고 들어온거잖아.
      비즈니스적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재범이는 상상속의 연인에 대해 “니가 가수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둘게”라는 가사를 썼잖아. 재범이가 이제까지 공개연애를 한 적도 없고 들킨적도 없는건 팬들을 버릴만큼(=인기를 포기할만큼) 마음을 확 빼앗긴 여자를 못 만나본거같아. 그러니 그런 가사를 썼겠지.
      가끔 이런 생각도 해. 스타 입장에선 걍 자기네들 얼굴보며 웃기만 하는, 자기네들을 적당히 좋아해주는 팬들을 더 반기겠다. 너무 심각하게 좋아하는 팬들이나 사생팬들은 뒤돌아서는 순간 무슨 복수를 할지 두렵지않을까..아 이거 넘 순진한 생각인가. 갑자기 웃기네ㅋㅋ

  14. 청순가련심은하 said on 2016-09-27 at 오전 2:16

    글치 눈치빠른 우현이가 언급할 리 없지.ㅋㅋㅋ 암튼 넘 비참해하지말고 앞으로도 계속 글 써라.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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