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에 바치는 헌사

 

“김어준이 명언을 하나 남겼잖아요. ‘결혼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닌데 이혼은 나 혼자 하는 것이다. 세계랑 모두 싸우도 반대하고 이혼하겠다. 그 때 어른이 된다.’ 그 얘기가 왜 정답이냐 하면, 결혼은 모든 사람의 동의 속에 이루어진 것 같으니까 안정감을 느껴서 착각에 빠진다고요. 통념과 관습을 다 받아들이고 산 거에요. 그런데 이혼해보면 알아요. 이혼은 진짜 내가 주인으로 서야 할 수 있어쇼. 내 편이 아무도 없어요. 저는 철학자니까 이렇게 얘기해요. ‘이혼하듯이 결혼해라.’ 이게 더 멋있지 않아요?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고 모든 것이 배경으로 물러나는 것이 사랑이에요. 거기에 어머니가 와서 두 사람과 맞먹는 자세를 취한다, 이 자체가 사랑이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이 언제 식은거냐면 자꾸 내 남자가 제3자의 시선에서 보일 때에요. 무인도에 둘만 있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그 사람만 있으면 되는 거죠. 카페에서 둘이 싸울 때 다른 사람 의식해서 ‘조용히 해, 목소리 낮춰’ 그러면 사랑이 끝난 거에요. 둘이 주인공이어야 하고, 나머지는 다 조연인데 다른 사람 의식할 때, 그러니까 제3자를 의식하게 될 때 사랑은 없어요.”

“누구를 사랑하려거나 누구한테 사랑받으려면 가면을 벗어야 해요.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해도 몇 명인데 ‘남자가 뭐에요?’ 내숭 떨고 들어가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가면을 벗었을 때 받아들여주는 사람만이 나를 사랑하는 거에요. ”

“모든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에 바치는 헌사에요. 그래서 저도 제가 하는 인문학을 사랑과 자유에 바쳐야 하고요. 인문학을 평가하는 잣대도 거기에 있어요. 다른 가치들은 없어요. 인간이 죽지 않는 이상 사랑과 자유가 가장 중요하죠.”

모든 사람이 자기 스타일대로 살기 위한 조건이 사랑과 자유다. 사랑을 할 때 인간은 자유롭고 강해진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고 거꾸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는다. 자유는 독립의 쟁취이기에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령 한 인간에게 단 한 번의 혁명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다. 인류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단 한 번의 혁명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혁명의 제스처만 있었지 그런 혁명이 일어난 적은 없다. 우리에게 여전히 인문학이 필요하고 인문 정신이 요구되는 이유다.

———————————————————————————————————————-

철학자 강신주의 인터뷰 책,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읽고 있다. 지승호가 인터뷰했다.

모든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에 바치는 헌사. 자기 자신으로, 주인공으로 살라고 말하는 게 그의 인문학이 말하는 전부다. 진짜 사랑을 하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자기 가면을 벗게 하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놀음이지 사랑은 아니다. 그리고 결혼은 사랑이 아니다. 결혼은 제도편입이고 계산 맞춰 하는 인생설계이며, 집안 간 만남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간혹 결혼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결혼하는 모든 커플들이 다 사랑하는 건 아니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이혼하는 것처럼 (내가 주인이 돼서) 결혼한’ 커플들은 사랑을 한 것일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 ornus를 사랑하면서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있는 논리만 진실로 보이고 제3자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연애상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당신이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진짜 사랑을 하고 있으면 제3자의 의견이 필요치 않다. 내가 결정하면 될 뿐이지, 객관적으로, 제3자가 봤을 때도 좋은 사람인지 계산기 때리고 있을 때 거기에 사랑은 없는 거다.

주부들 모여 있는 사이트에 생활정보를 얻으러 가끔 가는데 자유게시판 글들을 읽고 있으면 간혹 좋은 글들이 있지만 대부분 나를 병들게 한다. 그 사람들의 보수성. 그 사람들의 퇴행. 결혼을 하고 나서 그 사람들은 퇴행했다. 자꾸 계산기 두들기며 밑지지 않는 결혼은 이러이러한 조건을 갖춘 결혼이고 노후가 보장되는 직업은 이러이러한 직업이고 내 아이를 일류대 보내려면 이러이러한 사교육이 필요하고 재산을 불리려면 이러이러한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그 사람들은 ‘혹시 예전에는 사랑을 해봤을지도,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살아보려는 노력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혼과 함께 그들은 분명히 퇴행했다. 그 사람들은 사랑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가장 빤히 들여다보고 밑바닥과도 만나고 성장하고 성찰하며 자신의 맨얼굴을 보는 것. 그것이 사랑인데, 그런 류의 사람들은 그런 데 관심이 없다. 어쩌면 삶이 그들을 그렇게 보수적으로 만들었겠지. 그런 데 자꾸 물들다 보면 나도 퇴행할 수도 있다. 그래서 멀리해야 한다.

강신주는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상식과 관습을 깨뜨리는 표현을 쓰기 때문에 호/오를 일으키는 대중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차피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피력할 수 있다는 건,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구분하겠다는 거다. 내 의견이 거슬리는 사람은 어차피 나와 진짜로 만날 수 없는 거다. 그래서 나는 호오가 분명한 사람이 좋다. 모두에게 좋은 평을 듣는 사람은 실은 아무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ornus 퇴근하는 길에 사다 달라고 부탁해서 이제 겨우 다섯 장 읽었다.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이기 때문에 쉽고 빠르게 읽힌다. 술술.

 

 

Comments on this post

  1. 심은하 said on 2013-07-06 at 오전 1:13

    주부게시판뿐 아니라 중고딩 동창들 만나 얘기하다보믄 다들 서로 퇴행하지…아 근데 나 지금 자꾸 반성하게되네…요새 자꾸 김대교한테 돈 좀 더 많이 벌으라 영어공부좀 해라 압력넣어서..ㅋㅋ 바라만봐도 좋을거라는 내 환상이 깨진지 오래.. 아 불쌍해라…

  2. wisepaper said on 2013-07-06 at 오전 11:05

    네. 누구나 다 어느 정도는 그런 욕망들 속에서 살아가지요 뭘.. 돈 더 벌기 위해서 영어공부가 필요하면 하면 되는건데 김대교님이 자기가 원해서 하면 주인공이 되는 거..(이게 강신주 철학이 하는 말…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Trackbacks and Pingbacks on this post

No trackbacks.

TrackBack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