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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20 년만에 드디어 조동진의 새음반이 나왔다.
모르고 있다가 어제서야 알게 돼 첫곡을 플레이한 이후로 이틀 째.. 아무것도 못하고 종일 이 음반만 듣고 있다. 

아니 음악만 들을 순 없어 일상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10곡의 노래들이 내 일상의 모든 것을 채우는 소리가 되는 마법을 체험하고 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우물이 있다면, 이 음악은 그 우물의 가장 깊고 깊은 밑바닥에 가장 무거운 돌을 묵직하게 놓아주는 것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20년 만에 이 음반을 내기까지, 그는 2년 전, 44년 간 함께했던 인생의 동반자 아내를 먼저 죽음으로 떠나보냈고,
그로 인한 깊은 고독과 상념들이 이 음반에도 오롯이 담겨 있다.

“기타를 집어 넣는 데 10년이 걸렸고, 그 기타를 다시 집어드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말하는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텅 빈 시간들’이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한다. 1947년생. 올해 일흔이 다 된 나이에, 그간의 음악적 내공과 숱한 세월을 담으면서도 새로운 실험적인 소리들이 너무나 편안하고 신비롭게 섞여 있는 음반을 들고 왔다. 음악과 가사가 합쳐져 ‘시’가 되었고, 그 시에는 시간과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과 구도가 담겨 있다.

이렇게 따뜻하고 초연한 엠비언트라니. 일렉트로닉이라는 장르 자체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공간 속으로 날 데려가는 느낌이다. 전자음악을 하려거든 이렇게.. 많은 사운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데 그 조화가 참 초연하고 부드럽다. 음악에서만 구도를 한 게 아니라, 이 음악은 가사와 한 몸이다. 20년 세월 동안 이런 가사를 가능케 한 삶을 살아냈겠다 싶은 성찰들이 담겨 있다. 차마 내가 어찌 다 이해하겠나..

다만 이것은 참으로 자기 삶에서 나온 구도구나, 진짜 삶에서 도달한 얘기들이구나 하는 마음이 북받쳐 올라서 어제, 오늘 음악을 들으며 자꾸 울음이 나온다.

내가 조동진을 알게 된 건 먼저 조동익을 알고나서 였다. 나보다 훨씬 전 세대 뮤지션이라 평소에 들어보지 못했던 ‘어떤날(조동익, 이병우)’의 음반을 우연히 알게 된 후 조동익의 <동경> 음반을 들은 게 시작이다. 조동익의 노래 ‘노란 대문’, ‘동경’ 등을 들으며 황홀경의 음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체험을 하면서, 조동익의 형인 조동진의 음악에도 당연히 관심이 갔고, 조동진, 조동익, 이병우의 음악들이 유희열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점점 더 깊은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국민일보 기사에 따르면 “조동진은 한 명의 가수라기보다는 하나의 장르였다. 그는 1990년대의 전설적인 레이블인 하나음악을 이끈 수장이었다. 조동진과 그의 동생 조동익이 주도했던 하나음악은 포크 가수들의 음악공동체였고, 한동준 김광민 조규찬 장필순 유희열(토이) 김창기(동물원) 등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반들을 제작했다. ‘조동진 사단’은 상업성이나 유행에서 초연한 채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정체성을 깊고 느리게 추구했고, 그런 그들의 음악은 포크라는 말로 규정하기 어려운 독특한 개성과 분위기를 형성했다.”

전곡이 하나의 곡처럼 돌고 돌아오는 느낌이라 첫곡부터 끝곡까지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다.
진짜 자기 삶의 구도에서 나온 것 같은 가사들이 너무 아름답고, 혼자 읽기는 고통스럽게 슬퍼서, 전곡 가사를 옮겨 봤다.

(모든 노래 작사 작곡은 조동진이 했고, 편곡은 조동진과 조동익이 함께 했다.)

1. 그렇게 10년 

어느 바람찬 봄날 갑자기
숨차게 부르던 노래 소리 그치고

어느 낯설은 길목 지나서
말없이 그렇게 십년을 다시 흘려보냈네

표정 없는 기다란 하루
길이 없는 숲의 날들

시간 아닌 시간 속을 지나는 바람
어느 바닷가 젖은 모래 위

하얗게 떠도는 거품처럼

그렇게 십년을 다시 흘려 보냈네

……………….

2. 나무가 되어

나는 거기 다가갈 수 없으니
그대 너무 멀리 있지 않기를

나는 별빛 내린 나무가 되어
이전처럼 움직일 수가 없어

나는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그대 너무 외면하지 않기를

나는 하늘 가린 나무가 되어
예전처럼 노래 할 수도 없어

나무가 되어
나무가 되어

끝이 없는 그리움도
흙 속으로

나는 이제 따라갈 수 없으니
그대 홀로 떠나 갈 수 있기를

나는 비에 젖은 나무가 되어
예전처럼 외로움조차 없어

……………………

3. 섬 안의 섬

거기 누가 있을지 거기 아직 누가
거기 누가 잠들지 거기 아직 그대

섬 안의 섬 섬 안의 섬

저 검은 물결 너머 내 절망의 거품들
저 거친 바람 속에 내 침묵의 시간들

거기 누가 있을지 구름 걸린 언덕
거기 누가 오를지 거기 아직 그대

꿈 속의 꿈 꿈 속의 꿈이 공허의 방을 지나 꿈의 창가로
이 버려진 시간 따라 밤의 향기로

꿈 속의 꿈 꿈 속의 꿈
섬 안의 섬 섬 안의 섬

푸른 빛 속을 지나 어둠의 바다를 지나
우리 처음 만나기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섬 안에 섬
섬 안에 섬

………………………..

4. 1970

바람 불어대는 비탈길에
해는 떠올라도

우리 푸르던 날 하늘빛에
더 서글퍼 보였었네

저문 거리마다 네온 불빛
밤을 밝혔어도

우리 고단한 꿈 어깨 위에
더 쓸쓸해보였었네

허기진 가슴들을 노래 불러 달래며
눈뜨면 어디로든

걷고 또 걸어야 했던
그래 그때 그때 우리는
떠도는 바람이었고

그래 그때 그땐 누구나
구르는 돌이었네

다시 쏟아지는 새벽
비를 피할 곳은 없어도

그대 흩날리는 긴 머리에
내 젊음을 걸었었네

그래 그때 그때 우리는
떠도는 바람이었고

그래 그때 그땐 누구나
구르는 돌이었네

………………………..

5. 하얀 벽

왜 자꾸만 잠이 드는 건지

이 눈부신 날에 왜 자꾸만 꿈을 꾸는 건지

이 공허한 밤에 하얀 벽 위에 춤추는 그림자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들여기 쓰러져 내려앉은 꿈

또 다른 시련일 뿐인데

거기 외진 곳 너의 잠든 모습

또 다른 하루의 외로운 밤일 뿐인데

왜 자꾸만 잠이 드는 건지

이 눈부신 날에

왜 자꾸만 꿈을 꾸는 건지

이 공허한 밤에

………………………..

6. 향기

밤은 깊었어도
길을 잃은 게 아니듯

날은 밝았어도
빛을 잃은 게 아니듯

봄은 다시 와도
모두 시작은 아니듯

너는 떠났어도
모두 끝난 게 아니듯

여기 떠도는 향기
꽃잎 흔드는 바람

그 뜨거움조차 꿈이라고 해야 할지
이 그리움조차 아니라고 해야 할지

………………………

7. 천사

그댄 어쩌면 천사였을지도

비 오는 저녁
고인 빗물로 내려와

그댄 어쩌면 천사였을지도

기다란 방을 지나
빈 가슴으로 다가와

창 너머 어두운 풍경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

멀리 불을 켜는 바다
그 눈부신 그대의 어둠 어둠

눈 앞에 펼쳐진
어지러운 세상

그 속에 다시 설 때까지

날 지켜준

천사

아마도 아내가 죽던 그 날 그 순간의 공기를 담은 듯한 곡, <그날은 별들이> 를 보면.. 죽음이라는 깊은 ‘무’로 들어가는 인간 존재를 만나게 된다.

가사뿐 아니라 이 가사를 실어나르는 곡 자체가 가사의 내용과 하나가 되어 있다.
몽환적인 공간감을 구현하는 소리와 가사의 경지가 우리를 죽음의 순간과 대면하게 해준다.

“깊고 푸른 내 슬픔은 물빛 고요한 강물”
깊은 슬픔이 물빛 고요한 강물이 되기까지 그가 보낸 시간들이 내게 전이되는 것 같다.
언젠가 나의 슬픔도 언젠가 내가 겪을 고통도, 아무리 격한 절규의 시간들이 온다 할지라도 물빛 고요한 강물이 될 수 있겠구나, 힘든 위로가 찾아온다.

또한 이 노래들은 ‘텅 비움’, ‘허무’에 대한 노래들이기도 하다. 이번 음반을 내면서 조동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텅 빈 지난 10년의 시간들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나날들이었다고 말했는데, 그 ‘텅 비움’ ‘공허’ ‘허무’만이 다달을 수 있는 진리를 담은 것 같은 가사에 깊은 위안을 받았다. 우리를 키우는 건 공허와 허무의 시간들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구도자의 경지. 거장의 유연한 고행 같은 음악.
자기연민과 신파와 나르시시즘이 없는 성찰적인 가사가 너무 좋다.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픈 앨범이다.
내가 만약 진정한 명반 리스트를 감히 만든다면 제일 윗자리에 올리고 싶은 귀한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