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명사의 인문학, 사랑, 정치, 경쟁…
호/오를 불러일으키는 대중철학자 강신주는 인문학은 ‘고유명사’의 학문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인문학자가 지향해야 할 것은 그래서 ‘자신의’ 학문을 만드는 거다. 모든 인문학과 문화 예술의 핵심은 고유명사라는 거다. 대학교에 있는 철학자들이 백날 칸트와 헤겔과 들뢰즈와 푸코와 노자와 장자를 연구하는데, “지금 이 시대, 이 사회에서, 나한테 칸트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 학자는 다 문제다.
(강신주는 철학적으로 ‘시’읽기 저작을 몇 권 냈는데, 이건 시 평론과는 다르다. 강신주는 자신의 인문정신의 핵심을 김수영의 시에서 봤고 김수영을 인문학자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김수영은 4.19의 시인으로 알려져있고 굉장히 체제적인 프레임이 씌워져 있는데, 실은 김수영은 4.19의 시인이 아니라 분단의 시인이다. 김수영의 인문정신이 싹튼 절대절명의 상황은 북이냐 남이냐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를 선택하라는 이념과 패권이 만든 프레임이 자신에게 주었던 고통이다.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분열. 이런 김수영의 고통을 산문화한 사람은 <광장>을 쓴 소설가 최인훈이다.)
수백년 전의 개념이 지금 이 사회에서 무엇인지 연구하려면 사회를 치열하게 연구하고 굉장한 애정을 갖고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런 학자 별로 없다. 정치에 참여하는 학자를 ‘폴리페서’라고 낙인 찍는데 그 프레임은 사실 보수여당 거다. 너희는 정치하지 말라는 건데, 사는 게 전부 정치인데 정치하지 말라는 것도 모순이고 이런 정치인들이 원하는 건 너희들은 노예다. 너희들은 정치적 주권이 없다는 거다. 정치하는 사람과 정치하지 않는 사람의 분업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근본적 분업이고, 분업논리는 가장 강력한 보수적 프레임이다. 지금 사회가 신음하는데 젊은이들이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 속에서 거의 사망신고 받기 직전인데 이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인문학자는 인문학자가 아니라는 거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고 고유명사의 학문이기 때문에.(그래서 강신주는 ‘사회계약론’도 굉장히 비판한다. 사회적 계약을 통해 정치적 주권을 대의적으로 행사한다는 개념에 대해서 비판적인 거다.
인문학은 ‘우리’도 아니고 ‘그들’도 아닌 ‘나’를 위한 학문. 내가 누구인지 알고 세상에서 내가 주인공으로 살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 지금 인문정신이 더 필요한 것은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힘들게 할 때 나는 나를 알아야 하고 강해져야 한다. (강신주가 자꾸 ‘나’에 대한 얘기를 하고 ‘나의 자유’에 대한 얘기를 하니까 왜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는데, 그는 자유로운 사람만이 인간의 억압구조를 발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에서도 실존주의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가 나온거다. 구조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할 수는 없고 자유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고통 -구조로부터 오는-을 느낀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을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가장 극적인 순간은 사랑할 때다.
사랑은 나와 너 이외의 모든 억압과 조건과 상황과 제3의 인물들을 배경처리하는 것.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받고 또 내가 그를 사랑할 때 이 세상에서 나는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강신주는 제발 사랑을 하라고 말한다. 결혼은 하지 말고-.-;;
그리고 사랑은 ‘미래가 없는 것처럼’ 오직 현재를 사는 것. 미래를 위해 지금의 기쁨을 억압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을 구겨넣을 때 사랑은 없는 거다. 결혼한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게 노후를 위해 저축하고, 미래에 살 아파트를 위해 지금 여행 안 가고, 미래를 위해 지금 안 노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강신주는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거는 굉장히 본질적인 개념이다. 그는 자본주의 경쟁 논리를 비판할 때도 이 ‘사랑’ 개념을 이야기한다. 자본주의가 문제인 건 사람에게 ‘경쟁’과 ‘분리’를 내면화한다는 건데 이것들은 ‘사랑’, ‘공존’, ‘신뢰’의 반대개념들이다. 자세히 풀어쓰면 “경쟁, 분리가 인간 사회에 일어나면 체제(자본주의)가 이기는 거고, 반경쟁, 사랑, 공존 쪽으로 가면 체제가 붕괴되는 거다. 서로 사랑하지 않게 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체제다.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거다. 우리의 사랑을 막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비판적 지식인이 되는 거다. 이 공식을 잊어버리고 인문학자가 분리와 의심, 불신 쪽으로 담론을 펴면 자기도 모르게 체제에 놀아나게 되는 거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경쟁 체제가 바로 사랑 못하게 만드는 교육제도, 1등 한 아이도 성적이 떨어지면 자기를 미워하고, 1등 못하는 아이는 1등 한 아이를 미워하고. 굉장히 심각한데, 이 아이들이 나중에 기성세대가 되면 그 때의 파국은 끔찍할 거”라는 거다.
실은 사람들이 자기를 경쟁의 판으로 내몬 사람들에게 문제 제기를 해야 되는데, 신자유주의는 이 사고조차 못하게 사람들을 마비시키고 있는 극단적 체제다. 이 신자유주의 안에서 30년간 성장한 아이들이 나중에 만들어낼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이건 심각한 징후다. 그리고 자살하는 아이들은 1등하는 아이들이거나 1등 근처에 가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경쟁’논리를 강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에 그 판에서 다른 희망을 찾지 못한 거다. 꼴찌하는 아이들은 자살 안 한다. 경쟁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 사회에서 살면서 꼴찌하는 거는 걱정이 안 되는데 ‘경쟁논리’를 내면화하는 게 더 무섭다. 강신주도 말하는 건데 30년을 부모 잘못 만나 큰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는데도 거의 30년이 걸리는데 이 신자유주의식 경쟁논리가 수십년간 내면화된 아이들을 어떡할 거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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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on this post
책 못읽는 요즘, 이런글은 나에게 책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