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와 셀린느를 다시 만나

결국 우리집 TV방의 쿡티비로 <비포 미드나잇>을 봤다.
1994년 오스트리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대학생 셀린느와 제시는 그로부터 9년 후 파리에서 재회했었다. 파리에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결국 놓친 제시는 아내와 이혼하고 셀리느와 부부가 됐다. 둘이 부부가 되어 7살 난 쌍둥이 여자아이를 키우면서 생겨난 관계의 그물망들과 시간의 무게가 내려앉은 <비포 미드나잇>은 휴가차 머문 그리스의 해변가 마을이 배경이다. 파리에 함께 살고 있는 작가 제시와 NGO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셀린느는  6주의 휴가를 그리스의 작은 마을에서 보내는 중이다. 오예 부럽다.

우리 곁에는 더 정신없는 남자아이들이 있어서 둘만의 시간을 자꾸 방해하는 아이들을 거실 노트북에 <또봇 시리즈> 틀어주며 입을 막고 간신히 영화를 봤다.

수천 년 전 유적이 낡아가는 남부 그리스가 배경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제시와 셀린느, 그리고 거기서 만난 지인들이 사랑과 인생, 일, 아이들에 대해 떠들며 지지고 볶고 늙어가는 것처럼 찬란했던 유적도 낡아가고, 그리고 유적이 낡아가는 수천년 동안 인간들은 몇 번이나 어리석거나 달콤하거나 조잡한 짓들을 반복하며 왔다가 사라져 갈 거다.

제시와 셀린느가 7살난 쌍둥이들을 키우며 육아와 일에 시달리는 현실적인 부부가 됐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은 대사로만 처리되고 있다. 영화 속 그들의 상황은 그들에게도 특별한 ‘이국에서의 휴가 기간’인 거다. 휴가의 마지막날밤을 진하게 장식하기 위하여 예약해놓은 호텔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어지는 그들의 수다는 전 시리즈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 절정을 보여준다. 승부가 가려지지 않는 탁구 게임 하듯 끊임없이 핑퐁거리는 그들의 대화들. ornus랑 나는 저런 식으로 대화하지는 않는다. 주로 내가 떠들고 ornus가 들어주다가 때로 선문답하듯 현자의 대답을 들려주기도 한다. 나랑 핑퐁 게임하듯 대화하는 남자. 흥미진진하겠지만 분명 나랑 크게 싸우고 헤어졌겠지. ornus는 나랑 게임하듯 말하기보단 영화를 다 보고 내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 애들 데리고 집 앞 공원으로 물놀이하러 나가는 남자다. 나도 성숙했다. 어린 시절이었다면 ornus에게 이런 남자의 모습도 바라고 핑퐁 게임하듯 내 말을 쳐주는 당돌한 남자의 모습도 바랐겠지만 그런 건 쌍으로 올 수 있는 합이 아니다. 이게 있는 남자는 저게 없고 저게 있는 남자는 이게 없다는 걸 안다. 이제 난 ornus에게 없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 (ornus가 내게 바라는 건 “네가 네 모습으로 사는 거”란다. 나보다 더 빨리 도통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바라는 게 “그저 당신의 모습 그대로 사는 거”라 할지라도 서로에게 사소한 불만 하나 없는 커플이란 건 아니다. 사소한 불만들이 우리 관계에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하지 않기에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 뿐이다.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가진 전처와 살고 있는 아들이  못미더워 미국 시카고로 함께 이주하고 싶어하는 제시에게 “나는 아이와 남편을 위해 내 커리어를 포기하는 그런 수많은 여자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외쳐대는 셀린느를 이해하지만 나는 그런 여자는 아니다. 나라면 ornus가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옮겨가거나 아님 ornus가 편해질 해결책을 꼭 찾아내고 만다. 그건 내가 남편에게 희생적인 여자여서가 아니라 본질적인 여자(어색한 표현이지만)여서인 것 같다. 나를 가장 나답게(강신주 철학식으로 말하자면) 받아들여주는 사람은 ornus다. 직장에서 일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ornus랑 있을 때 페르소나를 벗은 맨얼굴의 인간으로 설 수 있어서다.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상태가 제일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래도 셀린느를 이해한다.

호텔방에서 싸우기 시작한 제시와 셀린느는 어떻게 될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18년간 세 편의 영화로 우리들에게 안부편지를 보내오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그리고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9년 후에 <비포 던>으로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
요즘 우리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우리에게 더 이상 들러붙지 않을 즈음 우리에게 다시 올 ‘우리만의 시간’을 기대한다. 그 때 할 일이 더 많기를 기대한다. 그 때 그저 그런 아줌마 아저씨가 아니라 더 ‘고유하고 개별적인 사람’으로 살게 됐으면 좋겠다. 인생 전체를 봤을 때 젊은 30대를 아이 키우느라 소진되고 있는 우리가 어쩌면 40대 이후에 더 젊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 그 때 인생이 지금보다 더 스러져 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걸 시작해도 될만큼 더 자유로운 시간으로 살 거다. 그 때는 우리도 제시와 셀린느처럼 휴가가 6주였으면 좋겠다ㅠ.ㅠ

 

 

Comments on this post

  1. 암헌 said on 2013-07-07 at 오후 7:37

    우리는 영화보면서 폭풍공감했는데 별거 아닌거 가지고 핑퐁하다가 막 싸우고…결국 누군가 화해를 신청하고…헐헐..

  2. 심은하 said on 2013-07-07 at 오후 8:46

    꼭 봐야겠군…전 시리즈를 보면서 딱 일주일간 심은하 버리고 나를 셀린느랑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졌었는데, 6일간의 휴가라…설정 멋지네…또 무슨 수다 대사들이 있을지 궁금…

  3. wisepaper said on 2013-07-08 at 오후 12:17

    암헌/ 내가 니네 커플 만날 때마다 그랬잖아. 둘이 기가 비슷해서 여태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거라고. 아마도 그 아웅다웅이 너네 커플의 존재 에너지가 아닐까? ㅎㅎ 사실 핑퐁게임을 아예 안 하는 커플은 없겠지. 정도의 차이일 뿐..

    심은하/ 꼭 보세요. 이 시리즈는 어쩜 한 편도 실망을 시키지 않는지.. 너무 좋았어요. 오래된 돌담, 낡아가는 유적, 집, 화려하지 않은 그리스 휴가지 풍경.. 우리도 6주 휴가 가고 싶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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