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갖는 일

좋아하는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님 블로그(http://imagolog.blog.me)에 오래 간만에 들어갔더니 이 글이 제일 먼저 보인다.
얼마 전에 개 타티와 함께 살기 시작하셨나보다.
그동안 몇몇 영화들과 몇몇 배우들을 향해 글을 쓸 때 마치 그들을 사랑하듯 대했던 그의 글 . 그래서 글 도처에 희열만큼 아픔도 느껴지던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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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 영화제에 가기 전에 암스테르담에 며칠 있을 생각으로 영화제 일정보다 조금 먼저 떠나왔다. 타티는 어머니가 맡아주셨다. 떠나기 전 어머니 전언으로는 밥을 안 먹고 캔넬(이동용 개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다고 한다. 타티와 함께 산 이후 계속 시간 쪼개느라 전전긍긍했고 도그리스(?)한 시간도 있어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열 몇 시간 비행기에 있는 동안 일도 하고 영화도 봤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보통 같으면 꺼놓고 도착까지 잊어버렸을 전화를 자꾸 켜서 타티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조금 무서워졌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해도 타티와 산책하는 것만큼 즐겁다고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어느 모로 보아도 평범한-그리고 내게 비교적 무심한- 이 개에게 나는 이상할 만큼 애착하게 되었다. 그렇게나 순식간에.  뭐가 그립지?  타티의 무게, 타티의 냄새,  타티가 내는 소리, 코골이와 기지개와 자잘한 버릇들, 짝짝이 귀와 눈, 어긋난 치열, 괄호같은 입매의 마무리, 털의 촉감.  네가 원래 갖고 있던 모든 것과 내가 지은 이름까지. 나는 내 개의 전부가 그리웠다. 이 개의 그 모든 속성이 달랐으면 지금처럼 마음이 매이지 않았을까? 이 의문은 개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결단이 먼저고 감정이 그것을 백업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 생각도 그랬지만 내가 이 개를 사랑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사랑은 가는 곳마다 작은 폐허를 남긴다. 그걸 감당할 기력이 이젠 없는 것 같다.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면서 내가 이 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음을 기뻐하며 지내다가 헤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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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기자님은 저 개와 사랑에 빠지셨구나. 이제 곧 폐허를 피하지 못하실텐데.

내가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음을 기뻐한다는 건 그를 좋아할 때까지만 가능한 일이다.
사랑하게 되면 기뻐함에서 멈출 수 없고 폐허를 만나야 한다.

“나를 사랑해주세요.” 하고 말하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게 신기하다.
이들은 사랑에 대해 성찰이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사랑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그런 성찰도 없이 쉽게 사랑에 대해 말하는 건지.
자신을 보며 마냥 기뻐하길 원하는 거라면 그건 자신을 좋아하는 것까지만 원했다는 뜻이다.
자신을 사랑하게 된 이가 가슴에 폐허를 갖게 된다는 걸 알았다면 사랑해달라고 쉽게 말할 수 없었을텐데.

사랑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다.
기쁨 이상을 갖게 되는 일이다.
기쁨, 슬픔, 몰락, 파멸, 도약, 행복, 공허, 믿음, 증오 같은.. 서로 모순적인 것들, 서로 극단에 있는 것들을 동시에 갖게 되는 과정이다.
사랑은 평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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