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에 관한 책을 읽으며 하는 생각


각자의 자유

ornus는 시애틀로 떠났고, 지난번 ornus 출장 때 아이들 데리고 이사하며 보냈던 얼마간의 시간이 남긴 후유증을 이번에는 겪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보내졌고, 나는 혼자 남았다. 맥북에선 아이튠즈 라디오에 만들어놓은 내 채널에서 슈베르트가 흘러나오고 나는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책을 읽으며 혼자다. 가평에서 바이바이 하며 열음이가 나한테 그랬다. “엄마는 이제 자유야~ 자유시간!!” (그걸 그렇게 잘 아는 놈이!) 나만 자유가 아니라 ornus도 자유고 열음이 은율이도 자유다. 애들은 규율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얼음축제며 빙어잡기 축제, 눈썰매장에 돌아다닐 계획으로 신이 나 있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고루 챙겨 떠난 ornus도 호텔방에서 우아하게 욕조에 몸을 담그며 자유로울 거다.

 

기억과 풍경의 도시 미학 – 파리의 장소들

어제부터 내가 읽고 있는 책은 파리와 서울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후 서울에서 ‘절망적인 현실’과 ‘자발적 부적응’으로 10여 년 파리에서 거주하다가 귀국한 학자 정수복 씨의 파리 연작 중 두 번째 책이다. 그는 이 파리 연작을 길게는 5부작으로 내 보고 싶다고 한다. 그가 쓴 도시나 장소에 관한 책은 작년에 재밌게 읽었던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과 파리 연작 두 권이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책에는 <파리를 생각한다 – 도시 걷기의 인문학>이란 제목이 붙여 있고 이번 책은 <파리의 장소들 – 기억과 풍경의 도시 미학>이다.

실증주의적 전통이 우세한 한국의 주류 사회학계에서 자발적 부적응을 택한 그의 글쓰기는 사회과학의 객관적 글쓰기와 인문 예술적 정서를 품은 주관적 글쓰기를 결합한 방식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개인적 체험에 뿌리내린 감성과, 논리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세계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과학자들의 학술논문의 감정 중립적 글쓰기의 경계를 넘고, 체험과 상상 세계의 주관적 표현을 중시하되 사회라는 실재의 분석을 등한시해온 순수 문학적 글쓰기의 경계도 넘어서고 싶다고 한다. 과학적 실증주의를 표방하는 글도 취향이 아니고 쉽게 감상주의에 빠지는 글의 과잉도 부담스러운 나에게 어느 정도 맞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이 책은 쉽게 말하면 파리의 ‘장소’에 관한 책인데 그 장소란 ‘기억’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도시를 걷다 보면 스멀스멀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과 지금 여기 일상을 떠나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상상력’을 결합시켜 도시 공간을 분석하는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글이다. 세월의 흔적이 오래 퇴적되어 있는 장소들의 역사적 의미를 두텁게 읽으면서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 너머의 아우라와 예술적 영감을 찾아내고자 하는 이런 글을 좋아하는데, 이국의 도시를 몇 주 몇 달 방문하고 그 감정에 취해 가벼운 낭만의 정서를 통찰과 혜안 없이 쏟아내고 있는 수많은 여행기들 속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책이다.

 

사는 집, 사는 곳, 끝나지 않는 생각

길게 보면 초등학교 시절 무렵부터, 짧게는 요 근래 몇 년 동안 내 화두 중 하나는 ‘장소’다. 장소는 ‘집’일 수도 있고 내가 사는 ‘동네’, ‘도시’, ‘국가’일 수도 있고, 내 몸에 영향을 끼치는 흐름과 분위기와 일상과 체험을 제공하는 모든 곳이다. 사람이 장소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장소도 존재(사람)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장소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강렬하다. 그러니 아무데서나 살면 안 된다. 아무 집에나 살아서도 안 된다. 나 자신을 배려한다면, 나를 편안하게 해주면서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곳, 미학적으로 맘에 드는 곳,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에 살아야 한다.

이사 오고 나에게 계속해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한국의 브랜드 아파트들이 가진 조악한 미감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2000년대 초반에 입주한 아파트이므로 (자금의 한계 안에서) 서울 시내에서는 그래도 많이 오래된 축에 속하지 않은 아파트를 고른다고 고른거다. 벽을 뱅뱅 도는 체리목 색깔의(원목이 아니다) 합판 혹은 PVC소재의 몰딩, 신발장, 씽크대가 나를 짜증스럽게 한다. 최고급 아파트는 내가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지은 아파트들이 둘러놓은 몰딩의 색감과 소재, 그리고 창문을 감싼 테두리들의 마감소재가 거의 이런 식이다. 내가 바라는 건 뭘까. 집이 조금은 춥고 불편해도 감수하면서 자신이 찾아 떠난 인간적인 삶의 조건과 동네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이깟 심미적인 불편함 때문에 짜증을 내고 있으니 내가 바라는 건 결국 더 비싼 자재로 지어진 고급스런 집이란 말인가. 아니다. 내가 바라는 건 ‘럭셔리’도 아니고 화려한 것도 아니고 그냥 흰 천장과 흰 벽이 몰딩 없이 깔끔하게 만나게만 만들어놓는 소박함이다. 제발 창문 테두리는 원목으로 할 수 없으면 이런 소재로 감싸지 말고 검정색 철제였으면 좋겠다. L 회사의 00캐슬은 맙소사 거실 벽에 금테를 둘렀더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거실 한쪽 벽은 ‘아트월’이란 이름으로 이런 만행이 자주 저질러지는 장소인데 그나마 회색 콘크리트 느낌을(느낌이 아니라 나는 그냥 진짜 ‘노출 콘트리트’였으면 좋겠지만) 살려둔 전에 살던 세교집은 덜 조악했다. 건설사들이 꾸미면 꾸밀수록 더 조악해보인다. 꾸밀수록 내 미감과 어긋나니까 차라리 그냥 덜 꾸미고 놔두는 게 낫다는 거다. 아마도 기술적인 문제들도 있을 거고 단가를 낮추려고 하는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단가를 낮추겠다면 차라리 소박하게 놔뒀으면 좋겠다. 테두리 두르지 말고 치장하지 말고.

남의 집이니 리모델링 공사를 할 수도 없고 그냥 살아야 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뭘 바꿔볼까 하다가 의욕이 상실되고 만다. 하나를 바꿔놓아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미 내 취향을 거스르고 있으므로 빛이 안 나는 거다. 그나마 거실 들어오는 입구의 신발장은 없애고 다른 가구를 놓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이걸 건드리느냐 마느냐로 며칠 간 고민하고 있다. 이걸 건드릴 돈을 모아 하루 빨리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집으로 이사갈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아니면 한 달을 살아도 돈을 들여 손을 대는 것이 맞는 걸까.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계속 유예시키는 삶은 어리석다는 걸 알기에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긴 하다. 내가 싫어하는 저 신발장을 없애면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오픈 수납장을 두고 그 위에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여러 화분들을 오종종하게 놓아보고 싶다. 나는 화초를 키우는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다. 화분은 한 달 안에 죽이는 게 내 특기인데, 열음이 은율이가 화분에서 자라나는 생명들을 워낙 귀히 여기니까 나도 이렇게 바뀌어가고 있다. 얼마 전 열음이가 사과를 먹다가 ‘사과나무를 키우겠다며’ 사과씨 몇 알을 빈 화분 흙에 꾹꾹 눌러넣었는데 거기서 새싹이 돋고 있다. (내 평생 사과나무를 진짜 길러보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고층 아파트에 살며 거실에 앉아 있다가 종종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는데 “거실에서 걸어나가면 우리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다. 우리나라가 이런 비인간적인 삶의 조건을 삶의 평균으로 삼고 있는 나라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거실을 나가면 흙과 풀이 있고 아이들은 거기서 뒹굴다가 다시 거실로 들어와 놀기도 하고 화분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꽃을 자라게 하고 집 안과 밖을 모두 누리며 사는 삶이 ‘진짜 삶’이 아닐까 고민하는 나의 다음집은 단독주택이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힘들다. 도시에서의 직장생활에 만족해하고 도시생활이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맞는데, 우리가 가진 자금으로 도시에 단독주택을 지을 수는 없으니 결국 또 이 생각은 멀리 유예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아파트의 조악하고 획일적인 미감을 비아냥거리고 거실창을 나가면 바로 낭떠러지라는 비인간적인 삶의 조건을 소름끼쳐하면서도 초고층 아파트 저 아래 강, 호수, 바다 혹은 다운타운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은 강렬히 원하는 욕망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한강변에 세워진 고층 아파트나 여행 갔을 때 본 시애틀과 샌프란시스코의 호수와 바다를 내려다보는 탁 트인 ‘view’를 가진 초고층 아파트의 거실 창을 부러워하는 것도 내 욕망이니 이걸 어찌할까나. 도시와 가까운 높은 언덕에 단독주택을 짓고 살면 해결되는 욕망일까. 수양과 성찰과 욕망을 조절하는 지혜가 더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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