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 버린 사랑의 고백, 영화, 남자..

 

김혜리 기자의 글을 읽고 있다가 내친김에 그의 트위터를 훑어보는 중 발견한 그의 멘션. “사람들은 성취욕, 야망, 이상이 세상을 구축해간다고 생각한다. 두려움과 망설임, 공포와 죄의식이 얼마나 세상을 만들어가는지는 헤아리지 않는다. 내가 알기론 영화가 필요한 건 그 순간이다. 실패해 버린 사랑의 고백. 그걸 쓸어담는 쓰레받기가 영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김혜리 기자의 글을 좋아했는데 그의 글은 거의, 늘 망설이며 말하고 망설이다 실패한 고백 같은 정서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평론가도 아니지만 기자도 아닌 것 같고 작가에 가까운 것 같다. 영화에 관한 그녀의 글은 분석하는 평론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수필이다. 이동진 기자는 그녀의 글을 가리켜 “누군가의 영화를 비판하고 있을 때조차도 비판하는 그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 그것이 비판인지 잊게 만든다”고 했다. 읽고 있으면 이 단어들을 모아 저 문장 하나를 완성할 때까지 얼마나 조용히 한숨 쉬고 있었을지 그 사려깊은 망설임의 순간들이 그려진다.

암담하고 절망적이고 외로운 순간에 호들갑을 떨지 않고 묵묵히 동생의 신발끈을 묶어주며 어른들의 도움 없이 길을 걸어나가는 소년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소년성을 품고 있는 몇몇 배우들에 관한 그녀의 상찬 같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와의 공통점을 찾은 것 같아 지긋이 웃었고, “영화, 음악, 문학, 장르가 뭐건 믿어온 아티스트가 새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여전히 멋지면, 사적인 현실에 찾아온 다행한 일에 버금가게 감각적으로 행복해지고 순간적으로 더 살아보고 싶어진다.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항상 많이 고맙다는 글”에 또 끄덕이고. 건축적인 영화를 좋아하듯이 건축적인 음악을 좋아한다며 서태지를 언급했을 때도 그랬다. 건축적이지 않고 한 필치에 쓱 담아낸 것처럼 만들어진 노래들도 물론 좋아하지만 벽돌 쌓듯 미세한 사운드를 한겹한겹 쌓아올리다가 마침내 그 작은 부품들이 단순히 전체의 합 이상의 시너지를 내는 하나의 노래를 완성하는 뮤지션이 나도 좋다. 음악가이면서 엔지니어인 그의 작법에 끌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만화가인 친구네 부부와 날밤 새며 얘기하다가 내가 그랬었다. 내가 매력을 느끼는 남자들은 거칠게 말하면 두 부류인데 ‘예술가’와 ‘엔지니어’라고. 아마도 둘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글을 써내려가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 설계도를 만들고 있는 엔지니어,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는 엔지니어, 알고리즘을 만들어내고 있는 엔지니어, 전산망을 구축하고 있는 엔지니어, 엄청나게 크고 복잡한 배의 구조도를 그리고 있는 엔지니어 등등.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떠오르는데, 말없이 고개 숙이고 돌아 앉았을 것 같은 그 뒷모습이 나의 영원한 판타지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키텍쳐를 그린다며 모니터 위에 네모와 세모를 선으로 연결하고 있을 때의 ornus의 뒷모습도 오래 바라보곤 한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두서없이 또 뭔가가 떠오르는데, 그 때 친구가 우리 부부에게 로맨스 얘기를 물으며 너는 확실히 로맨스가 있는 것 같은데 ornus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는 뉘앙스의 질문을 했다. ornus를 대신해 말하는 건 이상할 것 같아 그냥저냥 넘어갔는데, 그렇게 보이는 게 신기해서 집에 와서 ornus에게 물어보니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글로 말로 더 많은 표현을 하는 사람이고 그는 글로 말로 자기 내밀한 감정을 꺼내 남들 앞에 표현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실은 나는 글로 말로 더 많이 표현하고 ornus는 남들 없을 때 행동으로 한다. 남자는 여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흥.

트위터 보다가 시작된 잡생각이 의도치 않은 데까지 흘러오고 나니 밥 안 먹은 걸 깨달았다. 아이들이 없으니 나는 엄마 대신 사람이 되는데 부작용은 밥 먹는 시간, 잠 자는 시간도 까먹게 되는 거다.

Comments on this post

  1. 암헌 said on 2014-01-20 at 오후 11:32

    김혜리 참 매력있지.

  2. a said on 2014-01-21 at 오전 9:19

    내 보기엔 o군이 온 존재를 종이 양에게 기대고 있는 것 같은데 🙂
    (몇 년을 지켜보다 문득 깨달음…)

    근데 엔지니어링의 목표는 보다 효율적인 이윤추구 아니었어? ㅋㅋ

  3. wisepaper said on 2014-01-22 at 오전 12:50

    암헌/ 그치.. 이렇게 섬세하면서도 머뭇거릴 줄 아는 글 잘 쓰는 사람 좋다.

    a/ a님의 표현이 완전 시적인데요. 엔지니어링의 목표는 제 판타지가 아니에용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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