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싶다 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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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생각이라는 게 해보면 정말 어려워요. 한 10분 생각하면 멍해져요. 한 시간 두 시간씩 계속 생각하려면 굉장한 내공이 필요해.
체력도 필요하고, 집중력도 필요하고, 생각을 끝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지적 논리가 필요해요 .

–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3학년 1학기까지 꽤 긴 사춘기를 겪었다고 한다. 오랜 사춘기를 겪으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바로 서점이었다고. 수업이 끝나면 서점으로 가서 두어시간씩 책을 보곤 했다. 그렇다고 책을 수백권 읽은 것은 아니다. 책을 펴놓고 멍하니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고,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의 형이상학적인 테마에 대한 사고의 훈련이 지금의 연출관의 밑천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작가를 할 사람이다’ 라는 생각으로 문학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찾고자 했던, 그 당시에는 관념적으로 보였던 삶의 방식이, 지금의 가치관에 커다란 밑천을 만든 것이었다.

– 책 <7인의 PD 드라마를 말하다> 중 안판석 감독 부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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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주 작가의 대본도 대본이지만 <밀회>의 연출을 보며 아 이건 연출자가 몹시 궁금하다 싶었다. 내가 본 한국 드라마(적어도 멜로 드라마 중에서는)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연출이다. 드라마가 권력 싸움, 세력구축의 과정, 사람들의 속물근성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사랑, 욕망의 문제를  다루면서 단지 기능적인 수준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깊게 묻고 있다. 보통 드라마 하면 이건 주로 작가의 힘이겠지 판단하게 되는데, 이 드라마는 작가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연출의 힘이라고 느끼게 된다. 인용한 저 짧은 글에서 눈에 들어온 부분이 ‘형이상학적인 테마’, ‘관념적으로 보였던 삶의 방식’인데, 그럼 그렇지 싶었다. 이건 평소에 형이상학적으로 깊게 묻고 관념적으로 사고하는 습성이 몸에 밴 사람이 연출한 거다.

멜로 드라마가 넘쳐나고 연애가 뭐냐 사랑이 뭐냐 떠드는 사람이 많은 시대지만  구원에까지 이르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 사랑은 자기를 응시하게 하고 가짜 자기를 맞닥뜨리게 하고 마침내 자기 껍데기를 벗지 않고는 못 서게 만드는데, 이 드라마는 40세 여성 오혜원이 그런 응시를 하는 과정, 지독한 성장 드라마가 될 것 같다. 감독의 제작발표회 때 인터뷰를 보니 자신은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자기 모습을 좀 들여다봤으면, 우리가 얼마나 머리를 굴리며 안전과 보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6회에 혜원이 다른 친구들 연애하고 사랑하는 스무살 나이 때부터 사랑과 연애의 욕망조차 밀쳐두고 예술재단과 아트센터에서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겹겹이 겉옷을 두르고 머리를 굴리며 살아온 자신에 대한 회한을 살짝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앞으로 이 회한이 훨씬 더 자세하게 까발려질 것이다. 아마도 혜원에게 선재는 첫사랑이 될 거다. 혜원이 그렇게 열심히 껍데기를 두르느라 자기 내면의 물음을 밀쳐두지 않았다면, 스무 살 때 20대 때 했어야 할 사랑인데. 어쩌겠나. 그게 40대 때 찾아온 것만으로도 복이고 그 대상이 스무살 어린 남자애인 것은 단지 소재의 선정성이 아니라 어쩌면 거의 필연 같아 보인다.

ps. 연륜있는 김희애의 연기도 연기지만 유아인의 연기는 정말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친구는 지금 그냥 선재다. 잘 몰랐던 배우라서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살펴보니 온라인 공간에 정제되지 않은 글을 쓰고 논란이 되기도 하고 욕도 먹곤 했나본데 자의식이 굉장히 강한 배우다. 말조심하고 절제하며 자의식을 둥글에 다듬어 모범생 같은 인성을 내보여야 논란이 없는 연예계에서 이런 자의식은 허세와 치기로 느껴지기도 하고 아무튼 대중들을 불편하게 한다. 근데 이 불편한 에너지 없이는 피아니스트 선재 역에 이렇게까지 몰입해서 이렇게까지 잘 할 수 없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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