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우아한 노비..

밀회.

먹이사슬, 계급, 돈, 우아한 노비
제일 꼭대기는 돈. 아니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마귀.
재벌과 부유층 밑에는 우아한 노비(혜원 같은)가 있고 그 밑에는 우아하지 않은 노비(대부분의 사람들)가 있고.

선재가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변주곡 연습을 마치고 그런다.

“제 맘 좀 쫌만 생각해 주실래요. 제가 가끔 가는 사이트가 있는데요. 거기서 저랑 대화나누던 어떤 형이 그랬거든요. 즐기라고. 저는 즐기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즐겨주는 거요. 저는 이 곡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비트 16 32 막 쪼개가면서 어깨 빠지게 연습하고 변주 8번 스타카토 드럽게 맘에 안들다가 어느날 뻥 뚫려서 기분 째지고.그게 최고로 사랑해 주는 거죠. 라흐마니노프랑 파가니니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게 장땡이잖아요. 먹이사슬이고 노비고 뭐고….”

선재는 이 판 자체를 도약하는 순수한 예술의 재미를 직관적으로 알아보는 천재다. 클래식도 어차피 상류층의 돈놀음이 되어버린 판에서 선재 같은 아이는 노비와 꼭대기의 먹이사슬의 게임에서 비켜날 수 있을까. 아니 쉽지 않을 거다.

8회 내내 협주곡 연습 장면이 많이 나와서 좋았다. 대사도 많지 않고 장면 전환도 많지 않고 롱테이크가 많은 이 드라마에서 수십분을 피아노 연주에만 할애할 때 그 어떤 대사들보다 울림이 크다. 콩쿨 준비 과정에서 피아노협주곡을 어떤 걸 할까 궁금증이 일었었다. 작가의 선택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쇼팽피협 1,2번도 아니고 라흐마니노프 2,3번도 아니고 그렇다고 차이코프스키 1번도 아니고 라흐마니노프가 파가니니를 변주한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변주곡이었다. 귀에 익숙한 피협보단 선재의 천재성이 가장 돋보일 곡으로.

여태까지 선재가 연주했던 곡들의 선택도 우연은 아닐 거다. 슈베르트 판타지아에서 두 사람분의 연주를 한 사람용으로 연주하게 만든 것도, 누구한테 배워본 적 없는 선재가 바흐 평균율에서 페달 밟지 않고 자연스럽게 레가토로 해석하는 타고난 재능을 부각시킨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선곡한 것도.

난 클래식은 그저 음악이 좋아서 몇몇 피아노곡과 협주곡 정도 듣는 수준인데 더 많이 듣는 건 ornus일 거다. 컴퓨터로 일할 때 가장 방해받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게 클래식이기 때문에 무작위로 듣는데, 곡제목을 특별히 외운다든지 곡 해석이나 곡 배경을 따로 시간내서 공부하는 편은 아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다만 이제 더 알고싶은 욕심이 많이 생긴다.

아무튼 먹이사슬 계급의 중간 지점에서 우아한 노비생활을 하느라 심신이 임계점에 이른 혜원은 선재의 저 진심에 화답한다. 그 결과는 간장통과 양념통과 계량기와 열린 식용유병과 접힌 상다리-.-

..
ps. 질투와 자기 삶에 대한 염증으로 지친 혜원이 조울증 걸린 사람마냥 선재를 몰아붙이고 밀어내고 화내고 울고 난리부르스를 떨 때, 알아요 날 좋아해서 그러는 거구나 이리와요 내가 알아요 하는 선재의 우직한 반응은 우리집에서 많이 보던건데, 그 때 내 꼴이 저 꼴이었구나 생각하니 숨을 곳이 필요했다.

Comments on this post

  1. ornus said on 2014-04-09 at 오후 10:20

    어우, 저 연주 다시 들어봐도 정말 좋다. 피아노 두 대로 연주하는 걸 들으니 이게 또 교향악단 연주하는 거랑 느낌이 다르네. 나도 피아노 배우고 싶은 욕망이 커지지만 난 안될꺼야 아마.. 은퇴할 때쯤이면 맘 편히 피아노 바이엘부터 배워볼까보다

  2. wisepaper said on 2014-04-10 at 오후 12:17

    오케랑 하는 거 혼자 듣지 말고 나한테도 좀 내놔봐.

  3. oz said on 2014-04-14 at 오후 12:02

    마지막 두 줄은 진짜 염장이십니다.
    선재같은 성격의 남편과 살다니요.
    울 신랑은 대강 비슷하지만 제가 하는 말에 영향을 받아요. 그냥 살포시 무시해주면 좋을텐데…ㅜ.ㅜ

    저랑 감상평이 너무나 비슷해 제가 쓴 줄 알았네요.
    피아노 연주 좋아요. 대사없이 음악으로 채우는 제작진의 뚝심. 감탄스럽습니다.

  4. wisepaper said on 2014-04-14 at 오후 11:18

    오즈님, ‘울 신랑은 대강 비슷하지만’ 이 정도면 대부분의 기혼자들에겐 염장인 거 아시죠?? ㅎㅎ

    드라마 거의 못 보고 사는데 간만에 이렇게 확 빠져가지고서는 음악부터 연출, 연기까지 다 맘에 들고 간만에 오즈님과 수다도 떨 수 있고 좋네요. 홈피에 감상평 자주 올려주세요~ 우리 태지오빠 컴백하기 전까진 이걸루!!

  5. ornus said on 2014-04-15 at 오전 8:25

    오즈님 오랜만에 뵙네요. 자주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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