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오래전부터 나의 화두는 ‘사랑’과 ‘성찰’이었는데, 사랑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 회의하거나 사랑이 무엇인지 개념화하는 데 시간 쓰지 말고 그저 무언가를 사랑하는 순간 나오는 빛에는 힘이 있고 그 힘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게 낫다고 믿는 내게도 사랑에 대해 회의적인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에 ‘성찰’이 빠졌을 때다. 성찰과 함께 가지 못하는 사랑 이란 그저 종종 감정과 욕망과 이기심의 쓰레기 덩어리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고 진저리가 날 때도 있다. 성찰하려고 몸부림치지 않으면, 사유하는 고통을 무릅쓰지 않으면 사랑도 쓰레기에 다름아님을 목도하는 순간이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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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인상깊게 본 영화 <한나 아렌트>. 무심코 오후에 틀어놨다가 ornus와 둘이 동시에 확 빠져들었다.
한나 아렌트는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대인 대량학살을 주도한 죄로 기소당한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참관하면서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한 여성 철학자이다.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는 수많은 유대인 그리고 대중들은 아이히만이 극악무도한 괴물이기를 바랐고 그러므로 괴물을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한나는 이 과정에서 아이히만이 우리와 다른 괴물이 아니며 오히려 준법시민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관료의 입장에서 착실히 수행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주장을 내놓는다. 이 주장을 내놓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사유를 전개하면서 나치의 옹호자, 나치 창녀라고 매도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나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준법시민이었다는 말로 그에 대한 단죄에 냉소적인 입장을 취한 게 아니라 ‘사유하기를 멈춘 평범한 한 인간이 저지르는 악’의 위험성에 대한 사유를 명백히 개념화하고 그러므로 아이히만은 유죄라는 분명한 결론을 거듭 말하고 있다. 아이히만조차도 자신은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나치의 톱니바퀴’일 뿐이었다는 논리로 자신을 변호했는데 한나는 인간은 사유할 수 있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자신의 평범한 행동과 나의 도덕률이 타인과 사회과 관계맺을 때의 맥락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때 저지르게 되는 악에 대해서 명백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나치전범이나 범죄자를 괴물, 우리와 다른 변종으로 떼어놓고 처벌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우리의 평범성이 어떤 맥락에서는 어마어마한 악을 도출해낼지도 모른다는 걸 외면하게 되고 그러므로 이러한 악이 계속해서 자행되는 사회에 대한 성찰은 멈춘다. 이후 그녀의 사유를 풀어놓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 출판됐는데, 언뜻 보니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책을 읽어보지 못한 내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난 상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순진하고 거친 요약’이 될지도 모르는 위헙이 있지만 이 영화는 ornus와 내가 요즘 붙들고 있는 인간, 사회,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해 느끼는 회의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로 다가왔다.
평범한 우리 역시 우리의 평범한 행동, 우리가 반복하는 일상의 도덕률을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사유하지 않으면 자기가 모르는 새에 어마어마한 악에 기여하면서 살게 될 수 있다. 인간은 첫째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산출할 결과가 무엇인지 사유해야 하고, 둘째 자신이 반복하고 있는 도덕률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과 사회 전체적인 맥락에서도 도덕적인지 사유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사유의무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따라서 소시민적으로 우리가 반복하는 준법행위나 무지에서 나온 행위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저절로 정당화될 수 없다. 매일 아침 회사에 가서 회사가 내게 요구한 규칙을 지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누군가를 만나 내가 행했던 소시민적인 선한 행동도 사회 전체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악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거다.
ornus는 한나에게 돌을 던지며 흥분하는 대중들이 나오는 장면을 보며 조금 다른 의미에서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일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온갖 문제에 부딪힐 때 “왜 사람들이 합리적이지 못할까, 왜 저렇게 뜬금없는 결론을 도출할까, 왜왜왜” 하는 답답함을 늘 겪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인간이란 존재가 웬만큼 몸부림치며 노력하지 않는 한 성찰하고 사유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게 더 쉽다는 걸 인정하고,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답답해하기보단 오히려 내가 이 어려운 성찰과 사유를 선택하고 있는가에 집중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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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과학 쪽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알고리듬 최적화에는 지역최적화(local optimization)와 전역최적화(global optimization) 두 가지가 있는데, 지역최적화를 해도 그게 전역최적화에 해법이 아닌 경우가 있거든. 큰 그림을 이해하지 않고 무작정 지역최적화하는 건 전체문제에 대한 해법이 아니지. 이렇게 보니 사람사는 일이랑 통하는 게 있네.
‘사유하기를 멈춘 평범한 한 인간이 저지르는 악’의 위험성… 신이 만들어낸 규율이, 신이 부여한 질서가 남에게 준 상처를 정당화 하는데 쓰인다면 감히 신 역시도 악에 기여한다 말해도 될까요. 저는 더 이상 사람이 문제가 아닌 수준의 사유에 이르렀어요. 누군가는 신성모독이라 하겠죠?
너도 그 수준에 이르렀구나. 기독교를 이용하는 사람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생산해내는 기독교의 교리, 아니 본질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 계속 생각해봐. 여러 가지 책도 읽고 생각해보고 너만의 사유를 쌓아나가면 돼.. 이번에 실질적인 경험까지 했으니 사유만으로 아는 것보다 더 구체적인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경험이 이렇게 중요한 거야. 사랑도 종교도 그 무엇도, 경험이 없이 ‘책읽기’나 ‘사유’만으로는 안 되는 거라서. 경험을 해본 사람과 안해본 사람은 천지차이. 항상 사유와 경험이 함께 가야 되거든. 나는 네가 이번 경험을 통해 성찰하고 있으니 잘 걸어갈 거라고 믿어..
너무 강렬한 단어들을 5시간 정도가 넘게 듣다 보니까 세상이 어지럽게 빙빙 돌아요… 막 토하고 싶고. 아무 것도 먹질 않았는데 이러기는 또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강렬한 (나쁜 방향으로) 경험이라니… 한국 가서는 책을 더 많이 읽어야겠어요
그들에게서 나온 그 병리적인 단어들이 너를 잠깐 오염시킨 거야. 며칠 지나면 웃을 수 있을 거야. 그들 세계에서만 통하는 그 병리적인 논리에 결코 너의 감정을 할애하지 말고, 바깥에서 성찰적인 시선으로 보는 비판자가 되면 돼.. 그렇게 될 거야. 곧 아무렇지도 않게 될 거라고 난 확신해. 나도 다 한 경험이니까~ 힘내! 넌 통찰력도 있고 직관도 있는 사람이라 이런 경험과 책읽기가 쌓이면 정말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아.. 나도 책 읽어야 겠다.
그쵸. 그래도 언니랑 함께한 나날들이 저를 충분히 강인하게 만들어서, 이야기 듣는 동안 완전히 사로잡히지는 않게 만든 것 같아요. (굉장한 정신소모를 느꼈지만;;;) 이런 사람인줄 몰랐는데 지금도 계속 연락와요 그 여자… 가기 전에 시간 나면 보쟤요… 빈말인거 아는데도 이런 말 하나하나가 넘 고통이어서 차단해야겠어요. 그만 보낼줄 알았더니…
어 차단해. 더이상 에너지 낭비할 필요 없으니까. 곁에 두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