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율이의 편지
몇 달 전에 은율이가 나에게 써준 편지.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은율이이기에 부모님에게도 보여드린 적 없고, 지난 여름에 암헌네 집에 놀러갔을 때 유일하게 암헌 커플에게 한 번 보여준 적이 있다.
내가 꽃을 좋아하는 걸 알고 저렇게 직접 핑크 꽃도 접어서 만들어 편지 앞부분에 붙인 거다. 덕지덕지 테잎 때문에 나 웃음.


옮겨 보면,
Dear mom, thank you for everything you do for me and for being my mom.
you are very good at always giving me those very philosophical talks that leave me scratching my head. I really like these because they are what makes us most of my random thoughts and are somethings to think about when I’m bored. These talks are also very important to me because I feel like they are what shaped my personality.What I appreciate most about you is that you always makes me feel better when something goes wrong. You’re always sitting down with me and giving me a talk about how everything is Ok. You also give me time to figure things out for myself.
Thank you for always taking time off to take care of me and keeping me happy. For example, whenever I want to do something, you give me the freedom to do it. You also take the time cook delicious meals for the family.
나의 언어로 옮기면,
사랑하는 엄마,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고맙고 엄마가 내게 해준 모든 일들에 대해 고마워요.
엄마는 늘 나에게 내 머릿속에서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는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줘요. 그런 이야기들은 내가 시간이 많을 때(따분할 때) 내 머릿속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생각들이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난 엄마가 내게 그런 말을 던져주는 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이런 대화들이 나의 퍼스낼러티(인격)를 형성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내겐 굉장히 중요한 대화들이에요.내가 엄마한테 가장 감사한 건, 뭔가가 잘못됐을 때 엄마는 내 기분이 괜찮아지게 만들어준다는 거에요. 엄마는 늘 내 곁에 앉아서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줘요. 그리고 내가 스스로 차분히 해결해 나갈 시간을 주지요.
나를 돌볼 시간을 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예를 들어 내가 뭔가를 하길 원할 때 엄마는 늘 내게 자유를 줘요. 그리고 또한 엄마는 우리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사람이에요. (갑분요리칭찬으로 끝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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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이로부터 이 편지를 받았을 때 놀랐던 건, 내가 그 의도를 겉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 아이에게 주려고 했던 것들의 핵심을 스스로 헤아리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그에게 가장 주려고 했던 게, 그가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도록 자율성을 주는 일이고 시간을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철학적인 생각들을 할 수 있도록 질문들을 던져주었고.
내가 그에게 주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것,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해나갈 자유에 대해 아이가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고. 이 사려깊은 편지가 갑분 요리 칭찬으로 끝맺음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통찰력 있는 아이라도 아이는 아이라는 것이 날 웃게 만들어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나라는 사람을 잘 이해하고 있는 말이 어린 아이인 은율이에게서 나왔다는 점이 뭉클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은율이는 또한 나라는 존재가 자신의 엄마일 뿐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라는 걸 잘 이해하는 아이이다. 얼마전엔 나에게 엄마는 스스로의 삶을 사는 인간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영어로 your own life를 사는 존재라고 말해줌. 나의 삶이 자신과 별개로 나라는 한 명의 인간의 삶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는 대화였다.
은율이는 어릴 때부터 내가 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는 아이였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아이이고, 나 또한 이 아이에게 자유를 주려고 굉장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사회와 세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은율이의 주된 관심사는 늘 과학이고 그 중에서도 우주인데, 이 유한한 세상에서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일이 가장 의미있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간의 역사, 우주의 탄생, 별의 생성과 소멸, 이런 궁극적인 무언가에 대한 탐구가 유한한 삶 속 가장 의미있게 다가온다는 말이 신비롭다.
그리고 열음이. 열음이는 한창 호르몬이 날 뛰는 틴에이저인데, 그 아이가 엄마인 내게 대답을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 시기의 아이들은 북한이 쳐들어와도 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암흑기인데, 그 아이가 건강하게 지내고 있고 내가 하는 말에 말대꾸를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최상이다. 열음이가 내게 준 건 그것만으로도 최상이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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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on this post
leave me scratching my head <- 이 표현 참 좋네~
도대체 비결이 뭐냐? 난 예지한테 아무리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도 소용없던데… orz
가볍게 답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진지하게 답하자면.. 난 아이를 키우면서, 인간이란 그저 자신이 타고난 가능성대로 자란다는 걸 갈수록 더 뼈저리게 느껴. 아이는 그냥 자신 안에 가진 가능성대로 타고난 기질대로 자라는 것뿐이고.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아이의 그런 기질을 조금더 발현하게 만드냐 아니면 덜 발현하게 막느냐 이 정도의 영향을 끼친다는 것. 내가 하는 건 그저 아이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는 것과 아이를 타인으로 존중해주려고 노력했다는 거. 두 가지밖에 없어.
그리고 은율이도 이제 사춘기에 들어서고 있는지 몇 달 전과는 또 다르심. 시니컬한 태도가 시작됐음. 이제 우리에게 다정한 놈이란 콩이밖에 없어. 콩이 너만 믿는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