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대우

색조합이 취향에 맞으면 그 어느 때보다 황홀해하고 예쁜 것들에 껌뻑 죽는 나지만 사실 그동안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일상을 잘 대우하지 않고 살아왔다. 일상적으로 항상 사용하고 보게 되고 느껴야 하는 소품들, 예를 들어 비누라든지 샴푸, 향수, 향초, 화장품, 작은 소품 등등을 선택할 때 굳이 내 미적 취향을 사용하지 않고 항상 가장 저렴한 거,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거나 구입해서 대충 살아왔다.

샴푸도 항상 마트에서 1+1 상품으로 가장 싼 거 대용량으로 하나, 비누도 마트 비누 코너 젤 밑칸에 있는 젤 저렴한 걸로, 목욕할 때 쓰는 바디용품도 하나도 없다. 런던 출장 때 곰순이네 집에 놀러갔다온 ornus는 내게 곰순이는 욕조 옆에 여러 가지 이쁜 바디 샴푸들 늘어놓고 쓰던데 당신은 왜 그런 거 안 하냐고 묻기도 했다.

화장품도 화장대에 이것저것 늘어놓는 것도 싫고 돈도 아깝고 해서 수분 크림 딱 하나만 서랍에 두고 쓴다.  스킨, 로션, 에센스, 아이크림, 영양크림 아무것도 없다. 색조화장품도 없고. 메이크업용 화장품은 파운데이션 딱 하나 있다. 식사할 때 가끔 초를 켜보긴 했지만 어둠이 내린 밤 가만히 앉아 쉬는 시간에도 은은한 향초 하나를 켜 볼 생각을 못했다. 몇 달 전 친한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어둑어둑한 밤에 향초 여러 개를 켜 두고 향을 맡으며 음악을 듣는 습관을 가진 친구를 보며 참 좋아보였다. 그는 “이게 나를 위한 작은 사치야” 했다.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날들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 아니라 ‘일상’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고 싶으면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상을 제일 소중히 가꿔야 하는데, 왜 그렇게 못했지. 가진 돈이 없이 학생 때부터 결혼생활을 시작했기에 항상 빨리 종잣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쫓기기도 했고 그런 일들은 내겐 사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옷, 여행, 책 등등에는 지르기도 했지만.

근데 일상을 대우하는 일들이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적게는 몇 천 원, 많게는 몇 만원 정도만 신경 쓰면 좀더 예쁘고 취향에 맞는 걸 사용하면서 나 자신을 대우하는 기쁨을 느낄 수도 있었는데 왜 그렇게 못했지. 요즘 이곳에 살면서 시간적으로 환경적으로 여유가 생겨선지 아주 사소한 작고 이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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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손잡이들. 옷과 생활용품, 가구를 함께 파는 이쁜 샵 ‘anthropologie’에서 샀다. 이번에 가구 사면서 5단짜리 먹색 서랍장을 샀는데 거기 달린 기본 손잡이들을 이걸로 바꿔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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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켜놓으려고 한 향초들. 하늘색에 가까운 연보라, 핑크색.. 다 내가 좋아하는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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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겅에 저렇게 시골 할머니가 소녀 때부터 쓰던 것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는 거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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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본으로 묶어놓은 보라색 비누. 이것도 앤쓰로폴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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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라색 물방울 무늬가 맘에 든 샴페인 잔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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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throw. 역시 앤쓰로 폴로지에서 샀네. 침대나 소파 같은 데 아무렇게나 던져두는 패브릭 소품 같은 거다. 식탁에 두려고 산 건 아니고, 한국에서 컨테이너로 오는 청록색 2인용 소파를 덮을 생각이다. 거실을 ‘연보라+연그레이’ 조합으로 꾸밀 생각이라 소파도 연한 그레이와 연보라톤이 들어가게 하고 싶어서.

거실은 연보라+연그레이 톤으로 모던함과는 거리가 멀게! 레이스 낭낭한 여성스런 소품들과 시골 할머니 느낌나는 1인용 의자, 빅토리안 디테일이 들어간 의자로 꾸밀 생각인데, ornus는 거실에서 어쩐지 남자가 속할 공간이 아닌 거 같은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Den에 ornus가 좋아하는 아주 모던한 소파도 있고 자기 공간은 거기 하라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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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올리브 오일과 다양한 비네거들, 이탈리안 드레싱의 모든 것을 파는 샵에 갔다가 이 올리브 냅킨 세 종류도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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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집에서 산 지중해 올리브색 접시랑 하얀 꼬불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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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쓰로폴로지에서 산 <프로방스와 코트 다쥐르>. 프로방스에는 꼭 한 달 이상 가서 살아보고 싶다. 느리게 흘러가는 오후, 햇빛에 낡아가는 돌담, 고흐가 앉아 그림 그리던 곳도 세잔의 아뜰리에도 가 보고 싶고, 한가하게 밥해먹으며 한가하게 걷고 싶다. ornus야 프랑스로 출장 갈 일은 없니? 했더니 프랑스는 IT 산업의 무덤 같은 곳이라며. 거기가 장사 젤 안 된다고. 콧대높은 프랑스인들은 신기술을 거부하는 인간들이란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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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봤다. 나를 미치게 하는 라벤더색. 난 왜 보라에 미치는가. 그리고 돌집. 여기 시애틀에도 5월에 라벤더가 아주 이쁘게 피는 섬이 있다.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배 타고 30분 정도 들어가면 된다고. 꼭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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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빠져들고 있는 인테리어 스타일. 우리 거실은 색감은 연보라+그레이톤으로 이런 1인용 의자들로 꾸며보려고. 물론 우리집은 너무 모던하고 너무 최첨단인 빌딩이라 이 분위기가 안 나겠지. 그래도 뭐 그냥 해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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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 난 여행에도 그다지 흥미 없고 그냥 집에서 자잘한 일상소품들과 가구들 사면서 집이나 꾸미고 요리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그러나 누가 프로방스 데리고 간다 그러면 무조건 간다. 가고 싶은 유일한 여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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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을 요즘 더 열심히 기록하는 이유는 1. 이곳은 몇 년 후, 수십년 후를 위한 나의 아카이브 같은 곳이고 우리 가족의 기록사진 모음 같은 곳이기 때문이 가장 크지만,  2. 들어오는 지인들이나 검색으로 들어와서 보고 가는 사람들에게 사소하지만 눈요기가 되었으면 하는 맘 때문이기도 하고 3. 혹시 나처럼 평소에 돈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일상을 대우하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들 중에 이쁜 것들을 좋아하는 내면의 욕망이 있으신 분들께 “아 이런 거 하는데 몇 천원에서 몇 만원밖에 안 드는구나 마음의 여유만 있으면 하고 살 수 있구나 알려주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다.

Comments on this post

  1. 심은하 said on 2015-04-04 at 오후 4:08

    사실 난 십대때는 보라톤에 열광하던 사람이었는데, 보라색 좋아하믄 일찍 죽는다는 소리 듣고 멀리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끌리는건 바이올렛 계통.ㅋㅋ
    저 식탁보 너무나 이쁘구나!
    근데 난 뭐든 고르는 기준이 무조건 싼것도 아니고 이쁜것도 아니고 샴푸나 비누 등등 성분이 나쁜거 조금이라도 덜 들어간거..뭐 좋은 원료 썼다고 써있어도 맹신은 안하지만. ㅋㅋ
    나는 일상을 이쁘게 가꾸는거 몇년에 한번 이사갈때만 하는 스타일이라서 평소엔 잘 못하는데..어쩌다 이쁜 모델하우스들 내부 인테리어 구경하다보믄 항상 신경쓰고싶기도 하고..ㅋ

    그나저나 니 홈피 보니 울집 싹 다 갈고싶구나! ㅋㅋ

    • wisepaper said on 2015-04-05 at 오전 11:59

      언니도 보라색을 좋아하는군요. 전 정말 연보라, 연하늘, 연회색, 네이비, 자주색… 인디언 핑크.. 이쪽 계열만 보면 황홀해서 미쳐요. 근데 은율이가 애기 때부터 보라색을 유독 좋아하네요-.- 밖에 나갈 때도 보라색 가디건만 입겠다고 고집하고.. 요즘은 그래도 좀 뜸하긴 한데..

      언니처럼 좋은 원료 들어간 거 고르는 것도 필요해요. 전 이제야 좀 신경쓰고 살아요. 그래도 사실 아직 덜렁대긴 하지만. 애들 먹을 것도 사실 전 유기농 같은 거 안 찾고 그냥 막 먹이는 편인데, 요즘 들어 달걀은 무항생제 달걀, 돼지고기나 닭고기도 항생제 안 먹인 걸로 고르는 정도에요. 다른 건 아직 그냥 사고.. ㅎㅎ

  2. 엽곰 said on 2015-04-14 at 오전 2:07

    앤스로폴로지!! 난 아직 거기서는 뭘 못 사… 비싸. 눈팅만 할 뿐..
    오르누스가 울 집 욕실의 아기자기 보디샴푸들을 눈여겨 보았구나… ㅋㅋ 난 몸에 바르는 것은 무조건 동물 실험 안 한 것을 고집하거든, 그런 것들을 대용량으로 사려면 정말 집안 거덜나지. 그래서 작은 것으로만 쪼리릭 널어놨더니 그게 눈에 띄었나부네. ㅋㅋ 내가 비단 같은 피부로 이날까지 소박 안 맞고 살았으니, 생계형 사치가 맞는 말이지. fully furnished된 남의 집에서 살려니 울집은 모든 게 부조화+저렴이 아키아들의 집합소.
    나는 가구나 인테리어에는 별 관심이 없고, 몸에는 사치부리는 것 같아. 먹는 것은 meat free+유기농+윤리적 생산된 재료들만 사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이 대부분 많게는 2배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니…. 이걸 유지하려면 다른 건 포기해야지.

    • wisepaper said on 2015-04-14 at 오전 5:41

      “비단같은 피부로”.. 아우 곰순이 일단 맞고 시작하자. ㅎㅎ

      맞어. 나도 기본적으론 같은 생각이야. 모든 부분을 다 사치하고 다 원하는 걸 사고 살 수는 없으니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역(그게 난 인테리어랑.. 소소한 살림들인 거 같애. 디자인과 관련된 것들)에서는 좀 신경쓰고, 내가 별로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는 부분에서 아끼는거지. 너도 그런 거지 뭐. 예를 들면 난 전자제품이나 자동차엔 진짜 관심이 없어서 자동차 싼 거 살라고~ ㅎㅎ 그냥 없이 살았으면 좋겠는데 또 애들 때문에 아예 안 살 수는 없고. 다행히 ornus도 자동차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유기농+윤리적으로 생산된 것들을 고르는 거 좋네. 나도 좀 신경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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