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Lost in Translation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포스터와 스틸 사진의 공허한 질감, 권태로운 두 배우의 표정, 그리고 들리는 소문들로 인해 오래 전부터 내 기대를 끌었던 작품이다. 소통의 불가능함 아니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지점, 바로 그 순간’에 관한 영화다. 진심이 교감되지 않는 가족. 이국(異國)에서 일어나는 소통불가의 상황들. 그리고 일상적인 이해의 순간을 벗어나 있는 호텔이라는 공간(혹은 비공간-호텔은 일상을 떠나 부유하는 곳이다)은 이 영화의 중심축이다.
배우로서 성공한 중년의 남자 밥 해리스(빌리 머레이)는 C.F을 찍기 위해 미국을 떠나 도쿄의 한 호텔에 와 있다. 어린 유부녀 샬롯(스칼렛 요한슨)은 잘나가는 광고 사진작가 남편의 촬영 스케줄차 도쿄에 왔다가 역시 같은 호텔에 머무는 중이다.
공룡 그래픽이 고층빌딩의 전면을 스크린 삼아 비춰지기도 하는 ‘초근대적(포스트모던한) 도시’ 도쿄에 머무르고 있는 이 두 미국인은, 여정의 시작부터 소통되지 않는 모든 난감한 순간들에 놓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이해되지 않는 몸짓과 관습과 맥락들, 통역되면서 무시무시하게 소실되는 말들 속. 하다못해 ‘아리가또’를 연발하는 도쿄인들의 과잉친절은 이 미국인들에게 불편한 불친절로 다가올 뿐이다.
‘밥’은 사랑도 로맨스도 믿지 않게 된 지 오래, 부부는 그저 한 가정의 공동 경영인일 뿐인 중년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남자다. 결혼한 지 2년 된 샬롯의 생활 역시 의미없긴 마찬가지. 그녀의 남편은 무성의한 ‘사랑해’를 연발하며 아침 일찍부터 급하게 짐을 챙겨 호텔방을 나가는 ‘워커홀릭’이다. 권태와 무의미와 무기력함 속에 선 중년의 남자 ‘밥’. 그리고 권태 뒤에 도사리고 있는 20대의 불안을 고스란히 앉고 흔들리는 젊은 여자 ‘샬롯’.
밥과 샬롯은 끊임없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소통불가의 순간들 속에 서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이들의 권태를 과잉 포장하지 않고, 그저 쿨하게 미끄러지는 화면과 음악들 속에 흘려보낼 뿐이다. 그 무엇도 명확하게 교감되지 않고 종종 미끄러지기만 하는 맥락 속에서 이 둘이 소통하는 것은, 서로의 권태와 위기를 알아보는 미묘한 느낌 덕택이다. 호텔방이나 재즈 바에 죽치고 앉아 있다가 때때로 만나서 모호하게 교감하는 이 둘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흐르는가. 아니 아무것도 소통되지 않는 지점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통역되는가. 어쩌면 이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잠깐의 매혹적인 사랑이라 한들 중년의 권태와 무의미함을 뒤흔들 수 있을까. 아니면, 소설가나 사진작가가 되려 했으나 이도저도 자신없는 철학과 졸업생 젊은 샬롯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까. 어차피 이들의 불안이나 권태나 무기력함은 해소될 수 없는 것이고, 영화도 이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결국 일정을 마친 밥이 도쿄를 떠나면서 끝나는 이 둘의 마지막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쿨한 장면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밥이 샬롯의 머리를 깊게 쓰다듬으며 건네는 몇가지 말들은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다. 관객에게 통역되지 않는 것이다. 물기를 머금은 눈가, 작은 동요를 뒤로한 채 작별을 받아들이는 샬롯에게 전달된 밥의 말은 무엇이었을까. “너무 불행해하지 마, 어차피 삶은 그런 것. 의연하게 지나가기를..” 뭐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굳이 딴지를 걸자면, 이 둘이 소통되지 않는 상황에 자주 놓이는 것은 도쿄라는 이국의 공간을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는 ‘미국인’의 몸에 밴 무례함에도 빚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종종 발견되는 異國에 대한 무시와 비아냥. 뭐 그러나 나에게 이 영화는 기대만큼이나 매우 좋았다. 커뮤니케이션이 미끄러지는 순간들을 포착하던 화면들과 지루함을 실어나르던 공기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덧붙임-개봉 당시 미국 평단의 극찬을 받았던 이 영화는 소피아 코폴라(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이다) 감독의 영화이면서, 위대한 두 배우의 영화다. 중년의 지루함과 권태를 때때로 찌그러진 코믹한 표정들을 통해 실어나르는 빌 머레이. 그리고 권태와 불안이라는 양립 불가능할 것 같은 감정을 한 표정 안에 담아내는 스칼렛 요한슨. 특히나 스칼렛 요한슨이 가진 묘한 에로틱함과 지루한 표정 속을 스치는 냉소는 독특한 쾌감을 선사한다. 진짜 배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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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on this post
안젤리나 졸리 언니에 이어 맘에 드는 여배우 발견~~
눈빛과 표정 속에 마음의 깊이가 느껴지는 모습이 좋더라.
그치? 스칼렛 요한슨 정말 괜찮은 배우 같지? (빌 머레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영화음악이 너무 좋았어…영화도 꼭 다시 보고싶다~~
그치..?.. 전체적으로 음악도 영화의 딱 그 느낌….참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