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고종석, 서얼단상, 도서출판 개마고원
고종석, 서얼단상(庶孼斷想)-한 전라도 사람의 세상 읽기-, 도서출판 개마고원, 2002.
제1부 전라도 생각
신분제로서의 지역주의 – 극우 멘털리티의 한국적 작동 양상
전라도 생각
조선일보 문제 재론
서얼단상
제2부 시와 정치
제비뽑기의 정치학
언어와 정치 사이를 오락가락하기
시의 운명
대통령의 두 가족
파리, 1994년 5월
제3부 부스러기들
일상 나누기
정체 자백
제4부 책읽기, 책일기
그 책이 거기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
개인을 위한 변명, 소수를 위한 변호
부정한 미녀들의 반역
Paul Ricoeur, Folle Liqueur
처변불경의 이성
살균된 사회, 위생처리된 언어
회고와 전망
*고종석 씨는 어깨동갑 아내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둔 40대 가장이다. 세 군데 대학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공부했고, 세 군데 신문사에서 경제, 문화, 국제 뉴스를 담당했다. 소설집 [제망매], 에세이집 [감염된 언어], [코드 훔치기] 등 10여 권의 책을 냈고, 현재 한국일보에 일일 칼럼 ‘오늘’을 연재하고 있다.(책날개 참조)
대학교 1,2학년 때쯤부터인가, 나는 가공할 만한 정력적인 글쓰기를 통해 사회 곳곳을 쑤시는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들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알 만한 그 이름들, 강준만, 진중권, 김정란 등등…..
이 이름들은 80년대를 지난 대한민국의 새로운 스타일의 지식인들을 뜻했다(라고 말할 만큼 나름 강력한 이름들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내공을 쌓은 경력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들이, 문화와 언론개혁, 정치구조 등에 대해 쑤셔댐으로 해서 이끌어낸 결과들은 정말 무시못할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전북대학교 연구실 구석에서 수년 전부터 조선일보 문제를 거론해왔던 강준만의 왕성한 글쓰기와, 진중권, 김정란의 가세(물론 이들의 세부의견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로 인해 활기를 얻었던 안티조선일보 운동만 보아도 그렇다. 이제는 안티조선을 지지하든 안 하든 그 문제의식에 대해서만큼은, 이 스타지식인들의 이름을 빼 놓고도 사람들에게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
그 이름들 틈새에서, ‘정력적인 글쓰기를 하는’이라고 수식하기는 좀 뭣하지만, 이쪽도 저쪽도 아닌데 이쪽이기도 저쪽이기도 한, 고종석이라는 회색빛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어줍잖은 빈약한 관찰의 결과, 내 시각으로는 가장 나와 잘 맞는 이름이라고 느낄 만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느꼈던 첫 번째 호감은, 그가, “내가 안티조선 운동이나 몇 가지 정치적인 사안에 동의하는 것은 거창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나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내가 반대하는 삶의 방식이 ‘미학적으로 볼 때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였다. 미학적인 불편함. 그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볼 때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부분들에 대해 들이밀고 싶은 나의 잣대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글을 통해 꾸준히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살고 싶은’ 자신의 태도를 드러낸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몇 가지의 틀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의 가장 밑자리에는 ‘나는 전라도 사람’이라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세대로선 깊게 공감하기 힘들지만)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은 자주 스스로를 사회적, 문화적 소수파에게 투사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은 다소 관념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막상 전라도에 가도 자신은 이방인 같다고 한 발 물러선다. 그리고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피해의식이 자신의 눈길을 소수파에게 돌려놓았지만, 자신은 막상 그 소수파에서도 중심부에 있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 쓰면,
“내가 전라도 언저리에 있듯이, 나는 빈민층의 언저리에 있고, 외국인 노동자의 언저리에 있고, 범죄자의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나는 물론 여성이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다. 일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학교 변두리에서 나이 먹도록까지 어슬렁거렸다. 소수파에 대한 나의 동일시는 거짓 동일시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것은 함량 미달의 동일시일 것이다. 나는 소수파의 소수파다. 그것은 내가 모든 집단의 주변부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 나의 주변성은, 내가 보편적 이성의 신봉자라는 데서도 왔을 것이다. 보편과 주변, 특수(당파)와 중심이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은, 어색하지만 현실이다.”
“30대 후반 이래 성욕을 거의 잃어버린 뒤로도, 나는 여전히 남자 친구들과 있는 것보다는 여자 친구들과 있는 것이 더 편하고 즐겁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인지도 모른다. 나는 가장 진지한 얘기를 여성과 함께 하고, 가장 진한 우정을 여성에게 느낀다.”
“한국인으로서의 내 정체성은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덜 원초적인 게 아닌가 싶다… 나는 결국 한국 여권을 지닌 채 죽겠지만, 애국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학교 주위를 기웃거려 보았고 문단 주위를 얼씬거려 보았지만, 결국 나는 학자도 예술가도 못 되었다. 결국 내 글쓰기는 기자로서의 글쓰기다. 그것이 크게 불만스럽지는 않다. 나는 한 사람의 기자로서 안티조선운동을 지지한다. ‘조선일보’가 한국 유사 파시즘의 선전선동 기지라는 판단 때문만이 아니라, 신문 지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기 쉬운 글쓰기의 권력화를 그 신문이 가장 비도덕적으로, 현저히 정치적으로 드러내왔다는 판단 때문이다.”
“변두리의 변두리라는 말로써 내가 징징거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무살 넘은 성인이 징징거리는 것만큼 보기 흉한 일은 없다. 나는 내가 변두리의 변두리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내가 오히려 중심에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나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글쓰기는 결국 모랄리스트의 글쓰기로 귀결될 것 같다. 도덕 군자의 글쓰기라는 말이 아니라, 16세기 프랑스 이후 프랑스적 맥락에서의 모랄리스트적 글쓰기 말이다. 내 글쓰기가 모랄리스트의 글쓰기로 귀결될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내가 젠체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모랄리스트는 내적으로는 보편적 인간성의 탐구와 연결돼 있지만, 외적으로는 예술적 학문적 무능력과 연결돼 있다. 그들의 정신에는 섬광은 있었으되, 강인함와 조직력과 인내심이 없었다. 그들은 날쌘 정신이기는 했으되, 위대한 정신은 아니었다. 그들이 흔히 에세이나 아포리즘 같은 비체계적 글쓰기 쪽으로 빨려들어간 것은 그들의 나약함, 그들 그릇의 작음을 드러낸다.”
“내게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더 짙은 혐인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모든 족속들 중 내가 가장 덜 싫어하는 족속이다. 나는 인본주의자다.”
지루하리만큼 장황하게 그의 말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이유는, 그가 밝히는 그의 정체성에 무엇보다 내가 깊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한 자기 위치를 가진 사람들’과 ‘강인한 조직력과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그들에게서 어떤 미학적인 불편함을 느낀다.
이 책의 중반 부분까지는 그의 정체성에 걸맞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지면을 메우고 있지만, 이 책의 마지막 4부 “책읽기, 책일기” 부분에서는 그의 무시못할 진중한 글쓰기를 볼 수 있다. 특히 김우창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처변불경(處變不驚)의 이성’ 부분과 ‘살균된 사회, 위생처리된 언어’ 에서 북한의 언어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부분에서 그렇다. 김우창을 빌려 보편주의와 상대주의 사이, 이성주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은 이 책을 그저 저널리즘적인 책이라고 보기 힘들게 만들 만큼 정독을 요하는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현재 최대 관심사는 언어라고 말한다. 그는 각종 사전을 손에 끼고 살며, 현재(이 책을 쓸 당시) 자신이 가장 깊게 공부하고 있는 분야는 북한의 언어라고 한다. 북한의 언어에 대해 풀어내고 있는 그 부분은, 여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커다란 스케일로 20세기를 회고하고, 21세기를 전망한다. 이 커다란 스케일에서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진중하고 끈기 있는 공부와 언론인으로서 겪은 실제적 경험을 통해 다져진 녹록지 않은 내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유목민들의 하이퍼 세계”에 덧붙여, 그는 “극우 집단주의와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꼭지에서 진중권과 김규항과 김정란에 대해 말하면서 이 책을 끝맺는다.
“요새 나는 내 정체성이 마구 분열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나는 분명히 우파인데 자칭 ‘좌파’인 진중권이 쓰는 글을 읽으며 유포리아를 느끼고, 나는 분명히 무신론자인데 자칭 ‘기독교인’인 김규항의 글에 홀딱 반해 독서백편(讀書百編)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도 마르크스도 참 품이 큰 사람인 모양이다……..
진중권의 문체가 점차 정통적이 돼가는 바람에 약간 의기소침해 있던 차에, 나를 고양시키는 책, “문화테러단 雜”이라는 잡지를 발견했다. 나는 이 잡지를 읽으며 한 번은 절망했고, 한 번은 안도했다. 대학문화가 아직까지도 기성세대 뺨치는 스노비즘과 집단주의에 젖어 있다는 걸 확인하며 절망했고, 그래도 거기에 맞서 싸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며 안도했다.”
*덧붙임 1: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김정란을 지지한다”라는 꼭지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문학관이 눈길을 끈다.
‘조선일보와 자주 인터뷰를 하는 신경숙과 은희경’을 비판하는 김정란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몇 가지 얘기를 풀어놓았다.
“우선 나는 김정란의 문학관에 공감하지 않는다. 김정란이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즐겨 사용하는 위의(威儀), 신비(神秘), 영성(靈性), 영혼, 신화, 아우라 같은 말들은, 그가 문학을 신성화, 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나는 단지 취향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뿐이다. 성글게 얘기하자면 내가 문학에 대해 (기능적인 그래서 천박한) 쁘띠부르주아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는 데 비해, 김정란은 (신화적인 그래서 고상한) 귀족적 견해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신경숙은 김정란과 비슷한 문학관을 지니고 있는 듯하고, 은희경은 나와 비슷한 문학관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문학에다가 다른 예술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아우라를 부여하고 그런 아우라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에 대한 깊은 애정-나르시시즘-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신경숙은 김정란을 닮았다(물론 이 둘의 글쓰기는 너무나 다르다)……..
문학에 대한 은희경의 태도는, 나처럼, 세속적인 듯하다. 그는 등단 이후의 자신의 빠른 대중적 성공 때문에, 문학이 별개 아니라는 걸 재확인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수여된 문학상들을 통해서 그는 문학제도의 허술함을 즐겁게 실감했을 것이고, ‘일상 너머의 문학’이라는 환상을-만일 그에게 그런 환상이 있었다면-깨끗이 지웠을 것이다.”
내가 김정란과 은희경과 신경숙의 작품을 꼼꼼히 정독한 적 없으므로 그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다만 나는 고종석의 이러한 코멘트에서 고종석의 문학관을 엿보았고, 거기에 공감했을 뿐이다.
*덧붙임 2:
‘사전을 몸에 끼고 사는’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외국어뿐 아니라 우리나라 말로 된 글을 읽거나 쓸 때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즉시 사전을 찾아보는 버릇이 있다. 고종석의 글에 ‘처변불경(處變不驚)의 이성’이 나오길래 넷을 뒤졌더니(게다가 나는 한자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몽매 수준이다), 이는 ‘상황이 바뀌어도 놀라지 않음’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상황이 바뀌어도 놀라지 않는다’라… 여운이 남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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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나니, 새끼 손가락과 오른 팔이 아파서 욱씬거리네….
나는 가끔 내가 기독교인이란 사실이 한국인이란 사실보다 원초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데…그나저나 한달음에 이 긴 글을 썼다니…정말 대단하구나…난 최소한 이틀은 걸리는데;;; 역시..지혜!
엇그제 도서관에서 이 책과 ‘엘리아의 제야’ 중에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골랐는데, 다음에 꼭 봐야겠네요. ^^
나 지금 ‘느낌의 공동체’ 읽으면서 신형철이 소설 평론을 할때 쓴 단어 중 ‘윤리적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세번째 접한 순간 잠시 나의 20대 시절로 .
나는 많은 책을 읽진 않았지만, 그나마 읽은 책들 떠올려보니 대부분이 그당시 논증적 쌈닭들의 글을 재밌게 읽었던것 같아. 특히 진중권의 글을 좋아했어. 강준만 글은 좋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끌어들이는 마력은 약했고. 고종석은 많이는 못읽었는데 담백하니 설득력 있고 좋았지만, 나를 매혹시킨건 쌈닭 기질이 가장 뛰어난 진중권의 글이었나봐. 역시나 싸움구경은 재밌어.ㅋ
근데 나 김정란 이름은 여기서 첨봐. 왜이러지ㅋㅋ 그때 알았더라면 당연히 찾아봤을텐데, 2000년대 초반에 설마 내가 컴맹도 아니었을테고ㅋㅋㅋ
갑자기 20대 생각하니 우리는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삶이야. 하긴 나는 좀 그당시 싸움을 넘 못했다. 지금도 드럽게 못함. 그래서 저런 책들 보며 대리만족 느끼나.
갑자기 이게 신형철이 좋아하는 윤리적 상상력과 뭔상관인가 싶은데, 어떻게 살아가야하나에 대한, 어떤 행동이 옳으냐에 대한 근본적 고민들을 적나라하게 펼치는 논증적 글들에 나는 흥미를 느끼니까. 그래서 문학작품에서의 윤리적 상상력이란 단어에서도 멈칫했나봐. (신형철 이분은 왜자꾸 엉뚱한 포인트에서 내 과거를 끄집어내는지ㅋㅋ)
글구 내인생의 십새끼 두명이 과거에 펼쳤던 어줍잖던 논리들을 신형철이 아주 심플하게 까주네. 신형철은 76년생인데 그당시 학교댕길때 또래 허세남 시키들의 똥폼을 극혐했었나 혹시ㅋㅋ 아 그당시 형철선배를 알고 지냈더라면 내 싸움에 도움을 주셨을텐데. 왜 내 주변엔 이런 선배나 친구가 없었냔말이다ㅋㅋㅋ
2004년의 글을 꺼내온 언니 놀랍습니다. 대체 몇 살이었지. 이십대 중반이었네요.
언니가 좋아했던 쌈닭 시절 진중권 정말 날렸는데. 월장 사건이었나.? 남자들이 여자들 욕하니까 진중권이 전투력이 넘치는 쌈닭이 되어 남자들의 찌질한 논리를 하나씩 하나씩 설파해나가던 모습들이 기억나요. 혼자서 수도 없는 사람들을 다 상대하며 싸워댔으니 에너지도 난사람. 사실 세부 이야기는 가물가물해서 전혀 기억이 안 나긴 하지만.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박정희 찬양 서적이 나오자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썼던 시절 진중권이니 얼마나 야물딱진 쌈닭이었는지. 10년 넘게 쌈닭으로 살던 진중권이 어느날 씨네21에 ‘글쓰기의 영도’란 글을 쓰며 자신의 글쓰기는 영도에 이르렀다고. 자신의 글쓰기가 자신을 옭아매는 윤리가 되어 우울감을 이겨낼 수 없다고 글쓰기 중단 선언을 했던 날도 기억나고. 그러다가 몇 년 후에 다시 회복했지만..
언니가 윤리적 상상력에 멈칫하는 것처럼 저 또한 늘 생각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되기 때문에 윤리란 말을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소설가에게 자기 윤리가 있는지 없는지가 신형철에게 중요한 문제이듯이, 나의 남은 삶도 나의 윤리를 확정해나가는 삶이 되길 원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