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예술이, 삶이 물러나는 풍경 – 여름의 조각들

여름의 조각들, 2008,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 제레미 레니에르

synopsis –
어머니 엘렌은 뛰어난 화가 폴 베르티에를 친척으로 두었고, 그로부터 물려받은 뛰어난 예술 감각으로 카미유 코로, 오딜로 르동, 루이 마조렐 등의 19세기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어머니 엘렌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여름날, 그녀는 맏아들 프레데릭에게 자신의 사후 이 집과 예술품들의 처리문제를 근심하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갑작스레 엘렌이 사망한 다음 프레데릭과 둘째 딸, 막내 아들은 유산 처리를 놓고 이견을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는 어머니 엘렌의 생신을 기념하기 위해 어머니가 한평생을 보내온 파리 근교 전원주택의 앞마당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자식들, 그리고 전원의 녹음을 가로지르며 뛰어다니는 손주들의 웃음소리로부터 시작한다.

이 식사를 보내고 얼마 후에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은 코로와 같은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이 집안 구석 구석 걸려 있고 루이 마조렐의 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가구들이 거실을 채운 프랑스의 예술적 전통을 계승해온 한 집안이 물러나는 이야기다.

자신의 죽음 이후 이 집안의 운명을 예감한 어머니의 생각은 적중한다. 이 전통은 자식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경매와 가격매김을 통해 뉴욕과 파리의 미술관으로 흩어지고, 예술품을 팔아 남은 돈은 중국 상하이와 미국 뉴욕 등지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의 사업자금의 한 몫을 담당하며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존재를 이어간다.

한 집안의 전통의 운명뿐 아니라 현대사회 모든 예술의 운명, 그리고 예술적 전통을 국가의 자부심으로 여겼던 프랑스의 운명, 그리고 어쩌면 우리 삶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예술도 전통도 삶도.. 한 세대는 어김없이 한 세대를 밀어내고 운명의 뒷자리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변모하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의 시작일 것이다. 

인상주의 회화의 화폭에 담긴 화사한 햇살처럼 따스한 방식으로 전원풍경과 집안에 손떼묻은 구석구석을 담아낸 영화는 프랑스 영화 특유의 잔잔함과 지루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자식들이 곳곳의 유산을 경매에 넘겨 휑해진 집에서 10대 손주들이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벌이는 마지막 파티 장면에서 울컥, 울음이 쏟아졌다.

한 세대의 가치는 퇴장하지만 이 가치의 마지막은 의외로 이와 가장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10대 아이들에 의해 그 마지막을 대우받고, 그 다음은.. .. 그 다음은 모르는 일이다. 그 다음은 이 아이들의 것이다. 훼손되고 버려지고 변모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삶의 운명이다.

할머니의 저택을 찾아온 손주들이 뛰어노는 푸르른 정원

자식들과의 마지막 식사

19세기 예술작품들이 구석구석 식구들의 손떼묻은 생활소품으로 자리해 있던 집안의 모습

자식들과 손주들이 각자의 처소- 파리, 뉴욕, 상하이로 돌아가고 남은 엘렌의 고독하고도 우아한 모습

오랜시간 이 집안과 함께했던 가정부 할머니는 엘렌이 죽고 모두가 떠난 후 오후의 햇빛이 물러나는 뒷마당을 바라본다.

집안에 있을 때 가족들의 추억과 손떼가 묻어났던 작품들은 파리의 오르셰 미술관에 놓여진 후 관람객들의 의례적인 관람동선의 한 축에 무미건조하게 존재한다.

경매도 끝나고 집도 팔린 후 마지막을 기념하는 것은 손주들과 그 친구들이 벌이는 파티

19세기 예술작품으로 가득했던 집안과 정원에는 10대 아이들의 애플 노트북과 스피커가 놓여진다.

파티를 벌이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옛날을 추억하는 손녀와 그의 남자친구

남자친구와 함께 할머니의 정원을 뛰어가는 손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울컥하는 마음 한구석에 따뜻한 위로가 찾아온다.

+ 덧말 1: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는 극장도 찾기 힘든 우리. 2천원 정도면 거실에서 편안히 감상할 수 있는 요즘의 유료 다운로드 방식이 매우 맘에 든다^^

+ 덧말 2: 그동안 이 공간에 써야 할 무수한 글들이 쌓였지만 어쩐지 이 게시판에 손이 안 갔는데 이 영화를 계기로 오랜만에 이곳에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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