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열병 같은 시간의 기록 – 영원한 여름


왼쪽부터 쇼우헝, 주인공 정씽, 둘 곁을 맴도는 후이지아


* 영문판 예고편 (좀 야한가..?.. 그래도 예고편;)


<영원한 여름(Eternal Summer>, 대만. 2006년작.
감독 : 레스티 첸, 배우 : 장예가(정씽 역), 장효전(쇼우헝 역), 양기(후이지아 역)

대만영화라면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 외엔 떠올릴 게 없을 만큼의 관심만 갖고 있었는데,
이 영화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이후, 언젠가 봐야지 하다가 드디어 보게 됐다.
습기를 머금은 찌는 듯한 여름. 시종일관 푸르른 색감으로 청춘의 열병 같은 시간을 담아낸 퀴어영화.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단짝친구인 두 남자. 그리고 한 여자. 두 남자 중 하나가 게이라면 삼각관계는 조금더 복잡해진다.

대만의 한 해안가 시골마을 초등학교.
속깊은 모범생 소년(정씽)은 선생님의 부탁으로 과잉행동장애를 앓고 있는 왕따 소년(쇼우헝)과 친구가 된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림도 함께 그리고 숙제도 함께 하고 등하굣길 자전거타기를 함께 하며 그들은 열아홉살이 된다.

열아홉에 이 시골마을로 이사 온 여학생 후이지아는 정씽을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 밤을 보내게 된 정씽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마음이 여자가 아닌 남자 그것도 단짝친구 쇼우헝에게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동성애자로 규정한 정씽은 친구 쇼우헝을 밀어내고 홀로서기 위해 애타는 거리두기를 계속하고, 후이지아는 정씽이 아닌 쇼우헝의 애인이 된다.

영화는 내내 동성애자인 정씽의 시선으로, 친구를 바라만 보아야 할 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억눌린 정서를 담아내고 있지만, 공부할 때나 농구를 할 때나 친구 정씽이 없으면 항상 찾아헤매다니는 쇼우헝의 감정 역시 우정으로 규정짓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정씽을 친구로만 여기는 쇼우헝이 정씽에게 바라는 우정의 한도가 늘 집착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쇼우헝의 집착에 가까운 우정은, 어린시절 혼자남은 운동장에서 느낀 끔찍한 공포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친구에 대한 유난한 애착일 수도 있고, 우정이나 사랑이라는 진부한 단어로 묶을 수 없는 지점을 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든 혼자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그 불안에 손내밀어준 존재를 향한 애착은 우정이나 사랑으로 규정짓기 어려운 근원적인 감정이 아닐까.
(후에 자신을 향한 정씽의 감정을 알아차린 쇼우헝은, 어떻게든 친구의 맘을 받아주고픈 열망과 기묘한 집착이 섞인 충동으로 정씽과 섹스를 하고(선사하고), 이것은 정씽을 더욱 고통 속으로 몰아간다.)

대학입시를 끝내고 타이페이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고 연인관계를 계속하는 쇼우헝과 후이지아. 그리고 쇼우헝을 밀어내려 노력하며 다른 대학을 가기 위해 입시학원을 다니며 공부하는 정씽. 그들의 열병은 여름의 끝자락을 향해 치닫는다.

어찌 보면 성장영화의 클리셰를 끌어온 듯한 부분도 있고 이야기 구조 자체는 평범하고 유치하다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종일관 감정의 전이를 일으키는 건, 푸르른 습기를 머금은 여름의 정서, 청춘의 빛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터질 것 같은 열병을 담아내고 있는 섬세한 연출과 찬사를 보내고 싶은 배우들의 연기이다. 주인공 정씽 역을 맡은 장예가는 대만 금마장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시종일관 친구를 바라보고 밀어낼 뿐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억눌린 정서를 세심하게 담아냈다.

거창한 성찰을 선사해주는 건 아니지만, 성장영화를 보면 유독 감정의 동요가 크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수능시험을 막 끝낸 열아홉 스무살로 돌아가 나의 내밀한 기억을 꺼내보게 된다.

단짝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던 ornus와 나.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느라 연락이 끊겼던 ornus를 수능시험이 끝난 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나는 스무살의 봄을 맞기 전 열아홉의 겨울을 짧은 열병을 앓으며 보냈다.
중학교 때나 그 때나 그는, 나에게도 사람들에게도 깔끔한 친절 이상을 베풀지 않는 무심함으로 일관했고,
수능이 끝난 후 그동안 읽지 못했던 수십권의 책목록을 곁에 두고 독서삼매경에 빠지려던 나는,
그깟 남자아이 하나 때문에 흔들리는 열아홉의 겨울이 너무 싫었다.

대학 입학 후 각자 집에 가느라 서울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경춘선 기차에 함께 탔을 때..
내 속도 모르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 그를 보며, 터질 듯한 그 감정이 부끄럽고 한심스러워 혼자 울었었다. 하하. 
날짜도 잊을 수 없는 3월 14일. 춘천의 한 선배 집에서 얼떨결에 함께 밤을 보내게 된 ornus와 나..
그 선배가 잠든 후 어색하고 미묘한 충동에 휩싸인 나는 “받아들이든 말든, 친구로 남든 말든 ” 무작정 고백부터 했는데,
여우 같은 ornus는 그 때서야 가방 속에서 화이트데이 선물이라며 이쁜 사탕상자를 꺼내들었다.
(내 고백을 이끌어낸 ornus의 여우 같은 연기가 너무 얄미워. 난 그 때까지 나 혼자만의 짝사랑인 줄 알았다-_-)

열아홉 스물. 그 때 그와 내가 이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우리 삶은 어디를 향해 나아갔을까.
해답이 없는 달착지근한 질문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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