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하고 유연한.

다음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주말의 늦은밤..
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모니터 오른쪽 상단엔 동영상 하나를 켜놓은 채 서핑을 한다.
수많은 그림을 보다가 재미없기도 하고 별 의미없기도 한 넷상의 낙서들을 보다가 모니터상에 떠도는 글들에 질릴 때쯤에서야, 내 뒤 소파에서 책을 읽다가 ‘항상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자고 있는 그를 본다.
우리 일상 중 가장 평범한 모습 중 하나라고 해도 될 거다.

이상한 건 문득 문득 그가 낯설다는 것.
대체 저 사람은 왜 어쩌다가, 내 곁에서 저렇게 잠이 들어있는가.
그와 매우 세밀한 일상을 공유한 지 8년 째니, 이정도면 꽤 오래된 커플 아닌가.
그런데도 문득 문득 낯선 느낌이 스쳐가는 걸 보면 인간 사이에 놓인 깊이에 대해 신비감을 갖게 된다.
..

그는…..
..말랑말랑하다.
그가 나 때문에 경직되거나 놀라는 걸 본 적이 없다. 나의 모든 것에 자연스럽게 대응한다.

나는 살아오면서 주위의 거의 모든 남자들(얼마 안되는)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편도 아니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대개가 ‘평범한(-_-)’ 대한민국 남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소리였으니까. 뭐.. 요즘은 남자들에게 ‘누나 참 편해’ 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니까 많이 변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언제나 연하의 남자에게서만 듣는다. 그것도 자유분방한 축에 속하는 그런 어린 남자들에게서만.

암튼 나의 어떤 발언도 어떤 행동도 전혀 놀라지 않고 말랑말랑하게 받아들여준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고 유일하다.
내가 어떤 무리한 발언을 해도 그에게서 나오는 말은 고작 “그래…?..하고 싶으면 해야지..” 정도다.

그는 ‘흔히 말하는’ 자상한 스타일의 남자다. 하지만 상대한테까지 자상함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자기는 나한테 이 정도까지 해주지만, 너는 나한테 그럴 필요 없다는 주의.
본인은 굉장히 세심한 편이지만 나한테 세심함을 요구하지 않고.
함께지내게 된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니, 전보다 (애교는 많아졌지만.)

그를 보면. 노력해서 얻는 것보다 타고난게 역시 강력하다는 허탈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예컨대 페미니즘을 공부했다거나 관심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본인 편한대로 행동한 것뿐인데,
그게 그냥 ‘그 이즘’에서 말하는 바로 그런 것들과 들어맞는 걸 발견할 때가 그렇다.

아무튼 처음에 나는 그저 내 이상형에 가까운 외적인 느낌(약간 멍한 표정의 소년스러움) 때문에 그에게 별 대책없이 호감을 준 것뿐인데, 계속해서 좋아할 수 있었던 건.
본인은 세심하면서도 남들에겐 적당히 무심한 태도를 취하는 그의 나른함 때문일거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파워를 가져가는 사람인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선.^^

말랑말랑하고 자연스럽고 꺾을 필요 없는 유연함.
뭐 거기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갖지 못한 다른 것들에는 나는 관심 없다.
그가 그런 것들을 가졌다면 분명 이런 것들을 갖지 못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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