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시 쓰기, 살기
하루를 보내고 저녁 7시 30분이 지날 무렵이면 열음이는 말한다.
“아빠가 고부싶어..(보구싶어)”
(블럭을 열심히 쌓아놓고) “이거 주차장이야. 주차장 열음이가 만들었어. 아빠한테 보여줄거야.”
“(밥과 반찬을 싹 비우고는) 열음이가 밥 다 먹었어. 아빠한테 보여줄거야.”
“아빠.. 고부싶어..”
그래 엄마도 아빠가 보구싶다.
…………………………..
열음이를 재우고 ornus와 함께 밤 열시부터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봤다.
극장에 갈 시간은 주말에만 나는데 주말엔 누구한테 열음이를 부탁할 수도 없으니 우리 함께(혼자 말고 둘이) 극장 가는 일은 지난 몇 년 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QOOK이 있다. 소파에 누워 리모콘만 누르면 몇 천원을 결제하고 영화를 볼 수 있으니 인터넷 찾아 보던 시절보다 더 편해졌다.
개봉 때부터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보게 됐다.
일단 나는 이 영화의 완성도나 마지막의 그 뛰어난 영화적 체험과 별개로 이 영화가 마음에 드는 지점은
서울 근교 소도시를 흘러가는 여름을 담아낸 영화라는 점이었다.
조금은 남루하고 떼묻은 집안 풍경, 여름빛을 가득 담은 초록 나뭇잎 사이로 쨍한 여름 햇빛이 부서지는 순간, 바람에 마른 잎들이 흔들리는 소리, 갑자기 후두둑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여름의 정서를 굉장히 좋아한다.
어릴 때 보았던 내용은 기억 안 나는 베스트극장의 한 장면이 아직도 간절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주인공이 여름 햇빛을 받으며 골목을 힘들게 올라 당도한 개량 한옥 마루 위에 사온 수박을 쿵, 내려 놓으며 땀을 닦는 장면이다.
아무튼-
………………………
시 쓰기란 무엇일까. 영화는 시 쓰기란 시로 살기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움을 찾는 행위(미학적 행위)는 삶의 윤리성과 일체될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는 지점 – 영화에서는 빛나는 마지막 순간 10분여 – 에 이른다고.
아니 미와 윤리는 결국엔 하나라는 것일지도.
시 쓰기 위해 미자는 끊임없이 세상 – 사과, 설거지통, 꽃, 나무 -을 들여다본다.
감정고조를 위해 사용된 배경음악이나 장식적 기능이 전혀 없는 영화임에도 미자가 세상의 사물을 들여다보는 순간은 영화적으로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순간들로 남는다.
이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장면이 아마도, “사과와 부탁과 애원을 하러 희진의 엄마를 찾아간 미자가 본래 목적을 잊고 살구나무와 꽃들의 아름다움에 심취되어 나름의 싯구절을 생각해내며 자기만족을 하고 있는 순간”일 거다.
그러다 미자는 불현듯 자신이 찾아온 본래의 목적을 떠올리고는 괴로움으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삶의 순간의 본래의 목적을 잊고 미자가 입에 올리던 싯구들은, 살구를 베어먹던 순간들은, 아름다운 장면들이지만 이내 초라해진다.
그렇다고 삶의 윤리를 배제한 아름다움의 추구는 공허하다고 심판하는 태도는 절대 아닌 것 같다.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우리의 순간들은, 시를 쓰려는 미자가 체험하는 이 아름다운 순간들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끝없이 탐하려는 순간이기도 할 터이니. 이것 없이는 윤리적 완성의 순간도 없을 것이고 아마도 예술가로서 이창동은 끊임없이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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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뜬금없이
얼마전에 읽은 박노자의 글이 생각난다. 북유럽에 하녀를 들여 집안일을 하는 집이 늘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집안의 일을 자기 손으로 처리하는 것은 다른 일과는 성격이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일이라는 투의 글이었던 것 같다.
나의 생각도 그렇다. 제가 먹을 밥을 만들고, 제가 먹고 난 흔적을 깨끗이 설거지 하고, 제가 입던 옷을 빠는 행위는 다른 일들이 가진 힘과는 다른 특별함을 지녔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다.
특히나 나는 아름다움과 진리를 찾아 치열하게 헤맨다고 말하는 예술가들(특히 남성)이 제 손으로 이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매일매일 단조롭고 불편하게 반복되는 이 일에 자신의 시간을 쓰고 있지 않다면, 그가 만들어낸 작품을 믿기가 좀 힘들다. 특히나 시라면 더욱더. 시를 쓴다는 것은 삶으로 시를 살아내는 것이고 사는 일의 가장 시작은 이 일들을 해내는 거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이고 시작일 뿐이다.
내 몸, 내 가족을 돌보는 일도 마찬가지다.
늦은 퇴근으로 아이가 잠든 후에 들어온 ornus가 무심한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설거지를 끝낸 밤에도, 목감기와 기침으로 새벽에 서너번씩 깨서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며 우유를 달라는 열음이를 파란 포대기에 업고 몇 시간이고 어르는 ornus의 모습을 볼 때도 나는 시를 생각했다. 시 쓰기를 생각했다. 시인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문제는 이 윤리가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 몸 내 가족을 챙기려는 나의 본능이 공동체의 윤리와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자가 처한 상황도 일종의 그런 상황이다. 내 몸 내 가족을 넘어서 타자와 진짜 소통하는 행위가 “시 쓰기”라면, 미자가 가족의 윤리를 넘어서 바깥-타자-공동체의 윤리을 오롯이 체험하게 되는 순간(타자와 하나되는 순간)이 진정 시를 쓰는 순간이 된다.
………………………….
모르겠다. 이것은 내가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골몰하다보니 영화와 내 삶 속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완성하고픈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 영화를 봐도, 책을 읽어도 자꾸 사는 얘기 게시판에만 글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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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on this post
고부 갈등이 떠오르는 이유는…?!
그래. 넌 그거 승화시키면 시인 되는거야….. 하하하 나두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