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쓸까/살까, 가난한 이의 살림집
대학 때 시간표를 짤 때 일부러 공강시간을 많이 만들곤 했다. 학교가 있던 동네에서 자취를 했던 터라 수업 몰아듣고 빨리 돌아가야 할 목적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도 아니니, 하루를 학교에서 서성이며 보냈던 것이 좋았던 터였다.
공강 시간 거의 자리를 잡고 앉았던 곳은 중앙도서관 참고실 서가 사이였다. 창가에 의자를 놓고 건축잡지와 건축서적을 쌓아놓고 이것저것 읽어대거나 아니면 햇살 아래 코를 박고 변태처럼 책냄새를 맡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전문적인 건축지식도 없고 건축에 대한 나름의 시각 같은 것도 없던 때였지만 사람들이 집 짓고 사는 이야기, 집이 모인 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집과 거리와 동네에 스며든 일상성과 역사성과 정치성을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마냥 좋았다.
막연한 생각이긴 하지만 집 이야기, 집에서 사는 사람 이야기, 동네 이야기 등에 대한 경험과 생각이 무르 익으면 책을 쓰고 싶을 것 같다. 그러나 무르익지 않은 이야기는 가치가 없다. 재미도 없고.
내가 싫어하는 종류의 책 중 하나가 요새 서점에 가면 흔히 보이는 한없이 고독하고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해외여행 기행문류다. 어디어딜 다녀왔고 저기서 몇 밤 잤고 여기서 이러이러한 것들을 봤다고 늘어놓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얻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마냥 떠나는 게 좋은, 시행착오가 절실한 이십대 초반의 독자들에겐 떠남 그 자체로 흥분을 전달할지 모르지만, 이제 유럽이고 아메리카고 아시아고 아프리카고 한국사람 발길 안닿은 곳이 없는 이 시대에 일관된 주제나 관점을 가지고 할말을 전달하지 못하는 여행서들은 무미건조하다. 차라리 정보라도 가득 담은 론리 플래닛 류의 여행서는 남는 거라도 있지.
집(혹은 건축물)과 거리에 담긴 역사성이나 사회성을 곰삭게 익혀 담고 정치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에 담긴 일상을 맛깔스럽게 조물거리는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우선은 내가 쓰려고 하는 이야기를 몸으로 살아내야 하고 그 경험을 통해 소화되고 무르익은 깨달음이 분명해야 할 것 같다.
집의 구조를 풀어낼 공학적인 지식이나 디자인을 풀어낼 미적인 전문지식이 없으므로, 심각하게 하려면 교육을 더 받아야 할지로 모르겠다.
전문 사료나 역사적 논문을 읽어낸 후에 쉽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바꿔담으려면 글쓰기 연습도 많이 해야 할 거다.
워낙 집과 길에 관련된 이야기를 좋아하니 요즘에도 전통 건축물이나 근대유산 혹은 지금 우리나라의 건축과 골목을 담은 책들을 놓치지 않고 읽어보려고 하는 편인데
요 며칠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노익상의 [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란 책을 읽으며 충격을 많이 받고 있다.
(사진: 벼농사를 지어 먹는 토지를 중심으로 구성된 촌락에서 밀려나 길가에 자리잡은 외주물집)
외주물집, 외딴집, 독가촌, 차부집, 막살이집, 새마을 미관주택, 시민아파트 등 제 탯자리를 떠나 갯가, 산간으로 들어간 이들의 외딴집, 도회로 들어와 파편화된 삶을 꾸려야 했던 이들의 살림집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들어 써낸 책인데, 이렇게 하나의 흐름을 갖는 살림집 이야기를 책 한 권으로 만들어낸다는 게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작은 단위의 마을 이야기를 쓰겠다는 심산으로, 서민들의 집들을 꾸준히 찾아다니고 밤낮 산을 타고 계절을 가리지 않으며 강을 건너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써낸 지 10여년이 지나서야 서민들의 외주물집-외딴집-독가촌-간이역-차부집-막살이집 사이에 일관된 흐름과 큰 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근대 이후 가난한 집의 원형은 조선조를 관통하며 경제, 사회, 문화를 밑바닥에서부터 이끌었던 벼농사 문화와 정착 촌락사회에서 내쳐진 이들의 막다른 길이라는 것이다. 국가와 전통 촌락의 유기적 카르텔의 근간을 해칠 수 있는 자유로운 이동과 이주가 엄격히 제한된 한국 사회에서 마을이 아닌 외딴 길가 외주물집에 삶을 맡기거나 산 속에서 화전을 해먹으며(벼농사가 정착문화를 만든다면 화전은 유랑에 가깝다) 국가에 의해 독가촌으로 밀려난 이들의 시름깊은 살림살이는
전통 촌락이나 농경 사회, 마을 등에 치중된 기존의 시각으로는 찾아낼 수 없었던 소중한 지점이었던 것이다.
책 중간중간 극히 빈한한 살림집 이야기이기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처절하고 감상적인 어조의 문장도 전혀 과하다거나 허위의식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오랜 시간 이 살림집 사람들과 함께 살아냈다고 말할 정도의 성실함과 진심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내공을 가진 글을 쓰는 건 아직 감히 바라지 못하겠다.
이번 여름휴가는 입덧이 잦아드는 시기여야 하므로 되도록 늦게 잡아 8월 중순 쯤 떠날 생각이다.
대구와 포항, 목포 등지의 근대 건축물과 근대 골목이 남은 곳들을 향해서.
이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책들이 나와 있고 자료도 많다. 무슨 거창한 주제가 있는 건 아니고 워낙 재개발 좋아하는 나라니 구석구석 사라지기 전에 부지런히 밟아보고픈 절실함 때문이다.
여름이니까 집들 마당에 사과나 석류도 익어갔으면 좋겠다. 열음이랑 도란도란 100년 전 근대 이야기가 담긴 집 안뜰에서 오래 전 냄새를 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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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on this post
대학 도서관에서 책 읽던 생각난다.
자기가 백만년간 홈피에 글쓰기를 망설인건 오직 값어치 있는 이 리플을 남기려는 깊은 뜻이었구나.. 고이 가슴에 품고 길이 남길 리플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