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맞추다
누워 책을 쌓아놓고 두어시간 읽다가 한 시간 쯤은 멍하니 앉아있는다.
너무 많이 급하게 읽으면 생각이 정리되지 못해 내 삶과 섞이지 못하고 공허하게 흩어지거나 소화가 안 돼 체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두 권을 같이 읽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노익상의 책 [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
올해 읽은 책 중 최고의 책이다. 오래 읽기엔 소화시켜야 할 감정의 무게가 크고 버거워 잠시 놓고 집어든 책이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의 책,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맞추다]이다.
1970년 첫 발령 이래로 38년 동안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보내다가 2008년 자신의 모교인 전북 임실 덕치초등학교에서 마지막 수업을 한 김용택 시인이 그간 아이들과 보내며 이리저리 써두었던 메모들과 아이들의 시, 짧은 에세이들을 묶어 낸 책이다. 아이들의 귀엽고 기발한 글들과 그림을 보다가 아무데나 펼쳐보았다.
중고등학교로 강연을 다니며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아이들의 꿈은 대개 의사나 판사, 변호사, 교사, 과학자, 공무원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날 우리들이 학교 다닐 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어보면 우리들은 하나같이 모두 조국과 민족을 들먹였지요. 공허한 빈말이었지요. 그렇지만 나는 빈말이라도 좋으니, 지금의 아이들 입에서 그런 공공의 꿈에 대한 말이 나오길 기대할 때도 있습니다. …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의 꿈이 겨우 의사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까. … 꿈이 의사요 교사요 판사인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지요. 그러나 대통령이 꿈이어서 대통령이 되면 무엇합니까. 정말 백성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아름답고 훌륭하고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국민들의 환호를 받는 좋은 대통령이어야지요. 대통령이 꿈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도 인생의 한 과정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 한 나라의 모든 학생들이 직업이 꿈인 나라는, 그 나라 사람들 모두 불쌍하고 초라하게 합니다.
열음이과 은율이에게 누가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이 아이들의 입에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삶의 자세, 삶을 향해 품은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열음이와 은율이를 한국 땅에서만 키우기 싫은 이유는 사실 조금 복잡하다.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며 선택하는 여러가지 태도들이 자칫 무엇에 대한 안티가 되어버릴까 하는 우려에서이다.
남들 다보내는 영어유치원, 남들 다 정성 쏟는 온갖 사교육, 온갖 입시교육을 시키지 않으며 키우는 건 결국 무엇에 대한 안티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결정권을 자유롭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대안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음이와 은율이가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자라나기보다는 아예 이 모든 것을 가능케한 이 땅의 제한, 억압, 선입견, 고정된 틀 자체를 뛰어넘어 자라났으면 좋겠다.
어린 아이들은 책으로 학습지로 기관의 교육으로 가르칠 필요 없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만져보고 던져보고 느끼며 알아서들 충분히 배운다. 오늘날 엄마들이 갓 돌 지난 아이들한테 한두가지 정도가 아니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열심히 블로그에 육아 카테고리를 만들고 또 그 하위 카테고리에 몬테소리며 프뢰벨이며 신기한 수학나라며 아기나라며 짐보리를 만들어 시켜보고 비교하고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여러 생각을 한다. 어쩌면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시간적인 한계에서 오는 조바심일 수도 있고, 자신들이 나름 고학력자이므로 아이들 교육도 최상의 것으로 주어야만 안심이 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가장 큰 건 두렵기 때문이다. 무언가 정형화된 틀을 이용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자유가 이 땅의 사람들에겐 공포인 것이다.
이 교구와 학습지들이 무서운 건 이 교구들을 판매하는 영업사원, 또는 엄마들이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커뮤니티에서 무수한 비교와 경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기일 때부터 각종 교구와 학습지에 노출되어 옆집 두돌짜리와 윗집 세돌짜리와의 은근한 비교의 시선을 겪으며 자란 아이들에겐 경쟁이 내면화될 수밖에 없다. 경쟁이 내면화된 아이에게선 필연적으로 자유를 누리는 능력과 상상력이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안하다간 뒤쳐진다는 사람들의 말에 나는 웃음짓는다. 내 아이들은 무엇과 무엇을 비교해서 무엇이 더 뒤쳐진 것이라고 쉽게 확정하는 사람으로 키우지 않으려 하는 것이니 말이다.
열음이와 은율이에게 여러 땅, 여러 풍경, 여러 일상을 경험하도록 해주고픈 것은 여러 모습의 삶과 사람들 모습을 자연스럽게 익히며 자기 나름의 세계관이 자리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나는 노마드적인 삶을 꿈꾸지만 이것이 아이들이 바라지 않는 삶이면 언제든지 내려놓을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유연한 가능성을 밟아보게 한 뒤에 이 아이들이 스스로 해내는 선택은 신뢰와 지지로 답해줄 것이다.
때론 두렵다. 내 육체는 한심스럽게 약하고 내 영혼은 생각보다 빈한한 것은 아닌지.
아이들을 키우는 우리가 이미 충분히 신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아이들에게 부지불식간에 어떤 틀을 지어 제한하진 않을지.
내가 어떤 최선으로 이 아이들에게 한다 해도 어느 부분은 그것이 이 아이들에게 제한과 결핍을 가져올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너른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려고 노력하면 아이들도 부모를 단지 부모만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고 인간의 결핍을 이해할 줄 아는 이로 자랄 것이라 믿는다.
아이들은 노는 것으로 충분히 자라난다.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맞추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이다.
Trackbacks and Pingbacks on this post
No trackbacks.
- TrackBack URL
Comments on this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