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놀이 중산층 놀이, 마인드 컨트롤
1. 백수 놀이
하루에 일정 시간 오솔길, 숲길을 걸으며 산책했던 어떤 철학자들의 심경을 이 세속인도 얼추 살짝 공감하고 있다. ornus가 회사를 그만두고 더더욱 대화를 많이 나누는데, 우리 단지 안쪽의 작은 산길과 큰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돌아오면 복잡했던 생각들이 조금은 정갈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ornus가 공식백수가 된 이튿날 새벽. H1B 쿼터 마감될까봐 전전긍긍할 때는 인터뷰 기회가 없었던 몇몇 회사들이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해오는데, 타임존이 많이 다르다보니 새벽 일찍부터 ornus는 테크니컬 인터뷰를 해야 해서 나는 애들 장난감방에 가둬놓고 인터뷰 하는 중에 애들이 거실로 나가는 불상사를 막고자;; 쇼를 좀 했다. 폰인터뷰는 노트북을 켜고 인터뷰어가 전화로 내는 문제를 인터넷 화면에 푸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몇몇 까다로운 문제 푸느라 ornus가 진이 좀 빠져 있길래 아침에 열음이 어린이집 데려다주러 온가족이 산책길에 나섰다. 은율이는 유모차 타고, 열음이는 새로 산 자전거 타고 어린이집이 있는 13단지까지. 단지 안에 들어서면 13단지 안에도 역시 작은 동산이 있는데 동산 옆길을 걸어 인적 드문 깨끗한 놀이터에 앉아 온가족이 우유 먹고 김밥 먹고 물 마시며 도란거리다가 열음이는 어린이집으로 들어가고 은율이와 우리는 다시 거꾸로 길을 거슬러 올라 집으로 돌아오는 아침.
2. 어제는 딱 하루 중산층 놀이를 해 보기로 했다
열음이를 데려다주고 설렁설렁 차를 몰아 죽전 신세계로 향했다. 우아하게 백화점 매장을 돌아보다가, 한동안 옷을 사지 않아 난감해진 ornus의 스타일을 매만지기 위하여;;, 가을 냄새 나는 간절기 셔츠 두 개, 깔끔한 반팔 피케 셔츠 두 개, 베이지색, 남색 슬림핏 면바지 두 개를 샀다. 중산층 놀이가 아니었다면 한번에 6벌을 사는 일은 없었을 거다-.- 폭이 아주 좁은 귀여운 칼라에 상큼한 가는 줄무늬 디테일이 한 줄 들어간 이쁜 피케셔츠를 두 개나 찾았는데! ornus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라 돈 아깝다는 생각은 안 하기로 하고 백화점 식당가로 들어섰다. 오전 자잘한 집안의 일거리를 마친 여유로운 사모님들이 백화점을 한 바퀴 도시는 시간대다. 별 중요한 일 한 것도 아닌데 백화점을 한 번 어슬렁거리고 나니까 금세 오후 늦은 시간이다. 다시 열음이를 데리러 갈 시간. 중산층 놀이도 일 년에 하루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매일 이렇게 살라고 해도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누며 집으로 고고씽.
3. 마인트 컨트롤
비자 쿼터 다 끝나서 갈 길이 막막했을 때 (사실 우리가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결정인) “학교로 가자”는 결심까지 하고 회사를 그만뒀는데, 운좋게 가까스로 쿼터 안에 들고 나니 그 때보다 더 많은 회사들이 인터뷰를 하자고 한다. 처음 비자 스폰서를 해줄 회사를 구하고 쿼터 안에 들 때가 힘들지 그 이후엔 비자 회사를 트랜스퍼하면 되는 거다. 어떤 길이 열릴지는 우리도 잘 모르겠다. 신입사원도 아니고 경력직이니 그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가려고 하는 방향의 경력과 딱 맞는 길을 찾는다는 건 실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운이 따라야 하는 것 같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딱 맞는 포지션을 찾아 들어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안 한다고 해서 안 좋은 결과만 오는 것도 아니고, 열정 못지 않게 시기, 운도 중요하다. 다음 선택지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 백수인 상태를 즐긴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아이 둘의 부모다. 그래서 ornus랑 둘이 앉아 마인드컨트롤하는 훈련을 하곤 한다. 걱정을 내려놓는 훈련..
아이들이 생기고 나서 가끔 ornus랑 주고받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못하게 됐을 때도 아이들 먹여 살릴 수 있겠지? 그럼 ornus는 “내가 길에서 무엇을 팔더라도 아이들은 충분히 먹여 살린다”고 대답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당장 내 육아철학을 A4에 서너장 써서 브리핑하면 나랑 비슷한 생각 가진 고수입(이게 중요함;;;) 맞벌이 여성들이 돈 더 주고라도 나를 고용하겠다고 줄을 설 걸?” 정말이다. 내가 그런 다급한 상황이 되면 틈새시장이라도 개척해야지. 아이들 생기고 나니까 두려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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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내려놓는 훈련…내가 가장 안되는 부분인데. 걱정땜에 괴로울 때마다 이런 생각 든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두 가지 저주가 걱정과 기억 아닌가.
걱정될땐 전 최악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봐요. 나 자신이 최악의 상황을 견딜 수 있는가? 있다!란 생각이 들면 그 걱정이 좀 가벼워져요..
난 나 먹고 사는 것도 못 하고 있어. 그저께는 갑자기 정말 앞이 캄캄하더라. 나를 보니까, 지금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그 뿐이야. 있어도 돈 되는 게 없어. 나 혼자 먹고 사는 걸 못 하는 내가 너무 놀랍고, 결국 이러다 스스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나는 두려워. 애가 있으면 아마 당장 죽을거야.
왜이래 이거. 니 말은 일견 맞지만 일견 틀린 말이야. 지금 당장 너한테 몸뚱이 하나만 남고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해봐. 뭐해먹고 살 수 있을까? 당연히 먹고 살 일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외면하는 거지. 머고 살 일 많으니까 걱정 마셔. 그러나 지금 니 상황에 이런 걱정이 안 될 수는 없겠지 그건 이해해.. 나도 오죽하면, 혹시라도 내게 극단적인 상황이 오면, 남의집 유모라도 하면서 애들 키워야지 하고 마인드컨트롤하고 있겠냐..
ㅇㅇ 그래, 그건 그렇다. 길거리 다니다 보면 식당 앞유리에 “이모 구함” 그러더라. 이젠 왠지 “알바 구함”에 이력서 들이밀기엔 너무 삭아버린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아무것도 없으면 뭘 못 하겠니. 다만 이곳, 한국에서 내 얼굴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늙어가는 걸 본다면.. 아.. 그건 더 싫다… 뭐든 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 가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