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여름이 다가오는 하루
..
햇빛이 쨍하지도 않은데 온도와 습도가 높으니 짙은 녹색 나무 아래 여름 공기가 훅훅 다가오는 날이었다.
오래 전에 신청해놓은 은율이 여권을 아직도 안 찾아왔고 교정치료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라 치과도 가야 해서
은율이를 카시트에 태우고 수원으로 향했다.
세교와 수원 사이 지하도는 언제나 무섭다.
나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 내 뒷차, 옆차는 날 무섭도록 몰아부친다.
그러니 나도 눈 딱 감고 속도를 올린다. 흑.
치과 앞 2층 옥외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은율이가 아직 잔다.
오랜 만에 통화를 시도한 친구한테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스케줄이 있는 것 같다.
은율이를 깨워 코디네이터 언니들에게 은율이를 맡기고 치과진료를 받았다.
이와 이 사이에 건 고무줄을 새 고무줄로 바꾸는 거다. 살짝 욱신거린다.
차를 달려 수원 여권민원실로 향한다.
하.. 몇 달 새 광교 공사가 또 꽤 진행됐구나. 못 보던 길이 생겼네 생각하는데 친구한테 전화가 온다.
운전중이라 여권민원실 앞마당 공원으로 주차해 은율이를 풀어놓고 전화를 다시 건다.
비둘기를 따라 휘둥그레한 눈을 뜨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은율이. 은율이가 저렇게 계속 협조해줬으면
좋겠다.
궁금했던 이야기, 사는얘기를 몇 마디 나눴는데 친구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다.
하고싶은 얘기는 아직 못 한 것 같다. 이 친구가 여자였으면 “이 기지배야. 바쁜일 끝나면 다한테 제깍 다시 전화해” 할 수 있는데 남자라서 그런지 그런말은 못하겠다-.-
전화를 끊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다른 친구한테 전화를 해봤다. 은사님을 뵈러 대학교에 가는 길이라서
이따 밤에 전화하자며 끊는다.
나는 유모차를 밀고 계단을 어떻게 올라가야 하나 왜 경사로를 안 만들어놓은 거야 기가 막혀서 땀을 흘리던 차였다.
여권을 찾으러 여권민원실에 들어갔는데 은율이가 가만히 있어주질 않고 자꾸 번호표를 뽑고 문 열고
밖으로 나가고 그거 잡으러 다니고 하다보니 나를 상대하던 직원이 짜증을 낸다.
어찌어찌 간신히 접수증을 내밀었는데 여권이 직권무효됐단다. 만든 지 6개월이 지나도록 안찾으면 직권무효가 된단다.
은율이는 자꾸 내 손에서 달아나 숨어버리고 나는 여권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다.
다행히 항상 가지고 다니던 은율이 여권용사진이 몇 장 있어서 그걸로 다시 여권을 만든다. 다음주 월요일에 찾으러 오란다.
주차료를 내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짙은 녹색 나무가 습기 속에서 후들거린다. 아 이 여름 냄새..
ornus한테 서프라이즈 문자가 들어온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며 구구절절 안 쓰던 편지를 썼다.
하 이럴수가. 나는 지난 번 ornus 생일을 잊어버리고 지나친 데 이어 결혼기념일도 까먹은 것이다.
예전에 엄마가 정신없이 살다보면 기념일도 까먹는다는 말을 하시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싶었다.
근데 내가 그꼴이다. 남편 생일도 기억 못해 저녁 때 당사자한테 직접 듣고 생일축하를 해줬던 때가 몇 달 전인데 우리가 5월의 마지막날 결혼을 했었다는 건 무슨 역사의 한페이지인마냥 전혀 기억에 없었던 거다.
순간 가슴이 울컥 나도 모르게 차를 돌려 서울로 가는 경부고속도로를 탔다.
강남으로 가서 ornus 회사 앞에 서 있어야지.
열음이를 잠깐 올라오신 우리 엄마가 데리고 내려가셔서 나한텐 지금 은율이 하나다.
10톤 넘는 트럭들이 나를 몰아부친다. 트럭에 받힐 뻔하다가 서울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겨우 보고 간신히 차선 변경을 했는데
맙소사 대전으로 가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수원에서 다시 우리집앞 동탄까지 떠밀려왔다.
내가 이래도 다시 강남을 가야 하는가. 다리가 후덜거린다. 낮의 화물트럭들은 너무 무섭다. 경부를 다시는 못 탈 것 같다.
그래서 ornus가 자주 타는 서울-용인 고속도로를 타야 겠다 생각했다. 동탄에서 연결되어 강남까지 가는 고속도로다. 역시 차가 별로 없어 한산하니 덜 무섭다.
우여곡절 끝에 양재까지 왔는데 퇴근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는다. 아까 은사님을 만나러 간 친구를 잠깐
만나면 딱 좋을 시간이다.
근데 친구가 휴대폰이 없다. 외국에서 잠깐 들어와서 전화가 없는거다. 연락할 방도가 없다.
애꿎은 친구동생한테 전화해서 그가 운영하는 쇼핑몰 참외 얘기를 한다. 울엄마한테 배달시켜드려야겠다 생각한다.
강남교보로 차를 돌린다. 강남교보에 들어가 사고 싶던 책을 좀 보려는데 은율이가 협조를 안 한다.
어린이책 코너에 풀어놓으니 애는 너무 신나 뛰어다닌다. 짐보리 장난감 도구들을 너무 좋아해서
열음이꺼 은율이꺼 하나씩 샀다. 너무 비싸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니까 사치를 해도 돼.
평소 같으면 그 가격 장난감은 안 사는데 결혼기념일니까 샀다. 결혼기념일과 애들 장난감의 상관관계가 뭐란 말인가. 내가 생각하고도 우습다.
ornus가 회의가 끝났다며 달려온다. 뛰어오느라 땀으로 젖은 셔츠, 어쩔 수 없이 붕뜬 머리칼(내가 싫어하는)을 하고 은율이를 덥썩 끌어안는데,
긴 하루가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가 나온다.
ornus가 셔츠를 적시고 뛰어오면 항상 언제나 가엾다.
가여운 사람에게 한마디 한다.
“..나 오늘 결혼기념일이라서 좀 비싼 거 샀어..어때 멋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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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on this post
“나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
헤드라이트는…… …. 오..토에요.
흠. 운전할 땐 무조건 내가 제일 잘났다 마인드가 필요해. 어디서? 우리나라에서는. 그러니까 잘난 내가 양보하고, 잘난 내가 다른 차들 메롱거리는지 훑어봐주고, 잘난 내가 눈치껏 잘 피하고, 잘난 내가 져주는 거야. 그래야 좀 숨이 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