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전
1.
어제 은율이를 시골집에 데려다 주고 왔다.
일주일간 은율이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작은외삼촌, 그리고 추억이랑 함께 보낼 것이다.
작년 12월 25일 은율이가 태어난 이후로 1년 동안 한 번도 은율이랑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열음이를 키울 때는 우리 집안에 열음이 하나라서 봐주실 분들도 많고 열음이 하나니까
지금보단 자주 떨어질 기회가 있었는데
둘째가 태어나니 아이 둘을 맡기는 것도 송구스러운 일이고, 또 봐주실 분들도 없고 해서
떨어질 기회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ornus랑 내가 지지고볶고 애들 감당했는데
이번엔 어른들이 은율이 내려놓고 가라 하셔서 눈 딱 감고 내려놓고 왔다.
은율이를 떨어뜨려 놓고
밤늦게 열음이와 ornus와 함께 밤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데
내 팔에 항상 매달려 있던 10kg짜리 짐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이 팔이 가볍다.
열음이도 있지만 혼자 걷고 뛰고 혼자 할 일 할 수 있는 열음이와 달리 은율이는 혼자 서고 걷지 못하는 아가라
나를 부여잡고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엄마 껌딱지 은율이가 울지 않고 오늘 밤 잠들 수 있을까..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자동차 안에서 아기 뒤치닥거리를 하지 않고 오로지 나 홀로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자꾸 팔을 만져보고 쓰다듬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돌보지 않고 그냥 내 육체 하나만 돌보며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아가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와닿지 않을 것이다.
문득 급체한 것이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에 울컥한다.
2.
오는 길에 잠든 열음이를 눕히고 나니 밤 12시가 넘어 다음날 ornus는 출근을 해야 하는데도
딸린 아가가 없는 이 밤에 그냥 자기 아쉽다고 한다. 커피를 넉 잔 마신 후 각성상태-.-
쿡으로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틀어놓고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들이 나오는 날을 골라 보며 누웠다.
청춘의 송가 같은 김동률의 노래를 들으며 감탄하고
존박과 함춘호가 편곡한 노래들을 듣고
스위스 아줌마 복장을 한 루시드폴의 시시껄렁한 노래와 아바타로 분장한 성시경의 크리스마스 노래에 웃고 강아지 옷을 입은 존박의 캐롤을 들으며 유희열의 변태감성에 감탄했다.
아 유희열은 어찌 저렇게 섬세한 변태감성을 타고났을까.
자신의 변태감성을 여성들에게 매력포인트로 어필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또 존재할 수 있을까. 유희열의 캐릭터는 예술이다.
3.
누워 ornus의 손을 잡고 ornus의 일 얘기와 앞으로의 길에 대한 대화도 나누며 내년을 계획했다.
지난 일년 여간 ornus는 미디어 컨텐츠 관련 일에 집중하면서 계속 미국하고 일해왔는데 지금 하는 일에 영화 컨텐츠 서비스 서버를 구축하는 일이 포함돼 있어서
같이 일하는 미국 동료들은 헐리웃 영화 제작사들과도 만나며 접촉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엔지니어인 ornus는 그럴 일이 없겠지 하…-.-)
며칠 전 미국출장에서 들어올 때 헐리웃 영화 스튜디오에서 선물한 영화 포스터를 받아 왔는데
강남 회사 사무실에 붙여놓으려고 들고 들어온 돌돌 말린 영화포스터를 보면서 아 ornus한테도 영화 관계자를 만날 수 있는 콩고물이 좀 떨어졌음 좋겠단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낄낄 댔다.
ornus는 아키텍트로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로 미국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나는 우리가 10년 후 20년 후에 했으면 하는 일 때문에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우리보단 상대적으로 많은 문화 때문에
꾸준히 해외로 나갈 방안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그렇게 되길 나역시 바라고 있다.
일하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비자가 없는 입장에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는 않다.
나는 은율이를 낮에 어린이집에 보내거나 도우미를 구하기로 했다.
풀타임 일은 아이들을 맡겨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할 수 없고(사실 하고 싶지도 않고) 파트타임으로 일도 좀 하고
나가기 전에 한국에서 배울 수 있는 일들 – 그동안 배우고 싶던 잡다한 기술들 배우는 거- 도 하고
충분히 쉬기도 하고 그렇게 조금씩 시동을 걸기로 했다.
그리고 운동. 운동과는 담쌓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 아 이제 쑤시고 결리고 나도 운동과 친해져야 할 한계상황이다.
살은 계속 빠지고 근육은 없고 내 몸엔 힘없는 물렁살만 붙어 있는 느낌이다..흑
4.
사실 새해가 왔는지 한 해가 갔는지 관심없이 지냈는데 알고 보니 1월 1일이라 묘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왜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리운가 닭살 돋는 얘기를 하며 큭 하고 웃는데
우리 나이가 언제 이렇게 됐지 실감이 나질 않아 그대도 나도 짠하다.
나의 에너지는 저 싱싱한 아이들에게로 옮겨 갔구나
내년 일 년은 나의 에너지를 다시 찾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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