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사이로 넘나들다, 핀란드 디자인 산책

이사가 끝난 후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 예전에 읽었던 두 권의 책을 다시 읽고 말았다.

1.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 서울포럼, 2003

몇 년 전에 산 책인데 얼마전 건축가 조성룡이 설계한 의재미술관에 다녀온 이후로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책의 기획자 건축가 김진애의 말에 따르면 언제나 40대로 기억될만큼 젊고 자유롭고 활기찬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건축가 조성룡. 이 책은 그가 60세 되는 해를 기념해서 그를 인터뷰한 글과 후배 건축가 23인이 건축과 미디어(조형, 모형, 그림, 사진, 영화, 텍스트, 디지털, 인터넷, 게임), 권력(돈, 전쟁, 언론, 믿음), 일상(자동차, 물건, 가구, 요리, 글자, 간판, 음악, 공연)을 넘나드는 글을 엮은 책이다. 건축 사이로 넘나드는 글들을 쓰고 엮은 이유는 조성룡이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건축과 영화와 책과 음악과 회의와 현장을 쉴 새 없이 오가며 넘나들고 경계를 허물면서도 자신의 고집은 지키는 사람.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일 테다.

조성룡이 설계한 작품 중 내가 직접 가 본 곳은 선유도 공원과 전남 광주에 있는 의재미술관이다. 선유도 공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수십년 전 우리 서울의 산업화 시대를 실어날랐을 낡은 파이프와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인위적인 끌어들임 없이도 풀과 꽃을 자라게 하고 물이 흐르게 하는 설계에 많이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은 스스로 변화하며 나이먹는 풍경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이런 공간의 건축가라니, 날고 기는 후배 23인이 기꺼이 글을 쓰고 축하해줄만한 품성과 멋을 지닌 사람일 것이리라.

조성룡은 건축가이면서 교육자이기도 하다. 기존의 제도교육으로서의 건축학과의 촉매제 역할을 한 서울건축학교를 만들어 젊은 건축가들과 역량을 나누고 교육하는 교장 선생님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90년대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는 일을 보며 건축가로서 충격에 빠진 후 십여 년 동안 그와 반대되는 딛고 일어서려는 노력, 미래를 보는 노력으로 해왔던 일들이기도 하다. 젊은이들과의 나눔은 그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도전거리”이기도 하단다. 젊은이들의 재능과 깊이로부터 기대감을 얻기도 하고 두려움과 묘한 라이벌 의식으로 도전거리를 얻기도 한다고. 건축가는 나이 60이 되어서도 젊은이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건축설계경기 공모에 참여하고 경쟁한다. 그는 남과의 경쟁도 경쟁이지만 나이와 관계없이 자신과의 도전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냐고 말한다.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남 생각 하지 말고 네멋대로 살아가라는 것.

집, 건축, 동네, 공간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좋아 취미 삼아 드문드문 관련 글들을 읽어 온 지도 십여 년이 지났다. 어떤 분야든 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일구고 인정받고 미래를 소중히 여겨 후대와 나누려는 사람의 말은 듬직한 위로가 된다. 남 생각 하지 말라는 네 뜻대로 살아가라는 단순한 말이.

2. 안애경, 핀란드 디자인 산책, 나무 수, 2009

길고 어둡고 혹독한 겨울로 기억되는 북유럽의 나라 핀란드. 이 책에 소개되는 핀란드의 디자인에선 청명한 물, 투명에 가까운 얼음 결정, 시릴만큼 상쾌한 공기와 자연의 냄새가 공통적으로 깃들어 있다. 상업적인 광고와 인위적인 요소들을 엄격히 규제하며 자연과 시민의 조화로운 삶을 고민하는 핀란드 공공디자인, 길고 긴 겨울이 지난 후 축복처럼 찾아오는 여름의 냄새를 사랑한다는 핀란드의 여름 숲속 집으로 대표되는 생태적인 마을 디자인, 자연의 요소를 주제로 만들어진 패션 디자인 등등. 읽는 내내 핀란드의 호수만큼 파랗고 상쾌한 겨울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저자 안애경은 핀란드 사람들과 디자인을 고독이라는 키워드로 마무리한다. 긴긴 겨울의 깊은 어둠 속에서 여름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과 비움의 공간. 이것은 고독한 이들의 공간 개념이다. 고독을 위한 디자인. 고독을 존중하는 거리. 우리에게도 이러한 공간개념이 있는가 생각해본다.

이제 곧 우리에게도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은근히 두려웠던  겨울의 춥고 적막한 시간들을 기꺼워하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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