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관 묵직하게 답답한 결

영화 <조디악>을 오늘로 세 번째 봤다.
너무 많이 보면 닳을까봐 아아주 오랜만에 다시 본 거다.

데이빗 핀처 감독을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세븐>, <파이트 클럽>도 봤지만
이 스타일리쉬한 영화들과 <조디악>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어떻게 저렇게 영화 전체를 한 호흡으로 흥분도 없이 아주 차분하게..
붕 떠서 약간 빗나간 것 같은 씬 하나를 만들어내지 않고 시종일관 장악할까.
어떻게 연쇄살인에 관한 영화를 <세븐>처럼 만들었던 사람이 시간이 흘러 전혀 달라 보이는 <조디악>처럼 만들었을까.

내가 정성일 같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영화평론가의 깊이가 없어 도저히 설명할 길 없는 느릿하게 조여오는 흥분 같은 게 있었는데 오늘 우연히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를 뒷북으로 보고 소름이 끼쳤다.
봉준호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봉준호 : <조디악>의 살인범은 제가 알아요. (모두 놀라자) 아, 물론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일동 웃음) 알고 지냈다는 게 아니라, 워낙 연쇄살인범 리서치를 많이 했잖아요. 굉장히 슈퍼스타급 살인범이거든요. 그런데 핀처가 그걸 다룬다니까 흥분했지요. <세븐>도 물론 멋진 영화였지만 <세븐>을 보다가 <조디악>을 보면 <세븐>은 완전 아기 영화, 유치원 애가 똥 싸는 영화예요. 두 영화 사이의 그 12년 동안에 이 사람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런 거장의 리듬, 호흡을 갖췄을까. 좀 다른 의미가 되겠지만 저는 <소셜 네트워크>도 재미있게 봤거든요. 말로 하기 참 어려운데, 그런 리듬이라는 문제가 논리적인 분석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 같아요.

<조디악>도 그런 경험이었거든요. <조디악>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느릿하고 그 어떤 흥분이 없어요. <살인의 추억>은 어떻게든 흥분시켜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잖아요. 감정적이고 찔찔 싸고. <조디악>은 차분히 가라앉아서 리듬을 장악하는데 완전히 충격이었어요. <세븐>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이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 사람 영화야 늘 재미는 있었지만 <조디악> 보고 호흡이나 리듬이 정말 부러웠어요. 놀라운 경지였어요.

… 화성살인사건을 다시 찍는다고 하더라도 난 결코 그렇게 찍을 수는 없겠다라는 생각도 들고. 리듬을 장악하는 게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결국 그런 거 못해보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마크 러팔로 등 배우들도 놀랍지만 감독이 더 놀라웠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사건이 일어나던 1968년부터 모두가 그 사건을 잊어갈 무렵인 1970년대 후반까지의 샌프란시스코와 발레호 등 북캘리포니아 일대의 공기를 찍어낸 것도 대단했다. 터질 것 같지만 터지지 않고 해결될 것 같지만 결코 해결되지 않는 시종일관 묵직하게 답답한 그 공기가 영화 전체를 에워싸는데 나는 그것이 일상이며 삶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일관적으로 삶의 결을 포착할 수 있을까.

<조디악>보다 창의적이고 톡톡 튀고 스타일리쉬한 영화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이 영화 같은 꼼꼼하게 장악된 결을 가지고 있는 영화는 정말로 드물다.
<조디악>이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와는 다른 지점의 결을 갖고 있다보니 대중적인 헐리웃 스릴러 영화팬들에게는 답답하다, 별로다 소리를 좀 듣는 것 같아서 처음엔 이 영화를 보고 내가 갖게 된 이 경외심이 뭐지? 의문이었는데 오늘 검색해보니 정성일이 꼽은 21세기 최고의 영화 30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아주 현학적이고 매니악한 정성일 같은 사람의 특성상 그 사람이 좋다고 하는 영화 명단엔 생소한 영화들이 자리를 거의 차지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나름 대중적인 영화 <조디악>이 있다니.

내가 그냥저냥 좋아하는 여느 영화 같으면 평론가든 나부랭이든 그 누구든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내가 좋으면 그뿐인데, 내가 아주아주 특별히 꽂혀 있는 영화라서 그런지 저런 의견들로 내 직관적인 감이 확인된 것 같아서 살짝 흐뭇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직관력은 좀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논리력과 분석력까지 갖춘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감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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