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을수록 함께
..
(앞부분 생략)
새로운 종교 운동을 시작한 카리스마적 창시자들은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개혁적이며 사상이나 행동에서 자유롭고 유연하지만,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추종자들이 늘면 각종 규율이 생기고 제도와 체제를 강화하게 된다. 어쩌면 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초창기 운동이 지녔던 자유로움과 창조성은 사라지고 신도들을 관리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게 되면서 억압적 기제로 작용한다. 이것이 대체로 종교들이 걷는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코스이다. 종교들마다 초창기의 정신과 비전을 선양하면서 개혁을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음 고독 허무 불안 소외와의 대면이 되레 본래적인 삶 이끌어
이와 대조적으로 영성이라는 것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 관한 것이고 자기 체험적이고 자기 반성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개인적일(personal) 수밖에 없다. 종교가 집단화되고 제도화되면 될수록 종교를 떠받히고 있던 개인의 영성은 진정성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관습적이 되며 세태와 타협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되면 될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란 한 개인이 자신의 고독과 상대하는 것이다”라는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은 종교의 사회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 그 반대로 종교란 집단적 흥분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며 한 집단의 사회적 정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고 신성화해 주는 기재라고 종교 사회학자 뒤르켕은 주장한다 – 깊이 새겨볼 만하다.
사실, 뼛속깊이 사무치는 고독을 느껴 보지 못한 사람,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절망의 터널을 홀로 통과해 본 일이 없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갑자기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 인생의 덧없음을 깊이 느껴 본 일이 없거나 초월자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은 단독자로 서 본 경험이 없는 사람,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고 세상만사가 모두 무의미하게 보이는 경험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과연 영적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죽음, 고독, 허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무의미성, 소외감 등은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루 종일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며 세상사에 몰두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과의 대면은 오히려 우리를 비본래적인 삶에서 본래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 영성을 일깨우는 영혼의 음성 혹은 신의 부름과도 같이 우리를 찾아온다.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섞이다 보면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홀로 있다 보면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든다. 영성은 홀로 있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은 일상적 자아, 사회적 자아에 매몰되었던 영적 자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이다. 영성의 각성과 함양에는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 있을 줄 아는 자만이 남과도 함께 있을 수 있다.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이 때때로 자발적 고독을 선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
.
현대인들은 제도 종교들이 더 이상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영적 공허 속에 방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영적 실험을 하면서 이전 시대의 인간들이 누려 보지 못했던 영적 자유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종교를 넘어 영성으로, 한 종교에 갇혔던 시야를 벗어나 인류 전체의 영적 자산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현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는 이것을 제삼의 영적 세계라고 부르고 싶다. 한 종교의 언어와 전통에 사로잡혀 절대화하지 않는 영성,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세속주의도 아닌 영성, 나아가서 종교와 비종교 – 성과 속, 진과 속 – 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비종교적 영성이다.
.
.
영적 인간관에 의하면 영성은 우리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 대면해야 하고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성 그 자체에 속한다. 표피적 자아 아래 숨겨진 심층적 자아, 영적 자아, 참자아(진아)와의 대면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겹겹으로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이 뜨인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개안의 경험을 돈오(頓悟)라고 부른다. 선에만 돈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유사한 영적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며, 종교와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욕심이 만든 허상에서 벗어나 세계와 인생의 실상을 보게 되며 자기 존재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한다. 소유보다 존재에, 성취보다 살아 있음에 더 큰 행복을 느끼며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된다.
(뒷부분도 생략)
.
.
글 길희성(편집 내맘대로) : 새길교회 신학위원 / 서강대 명예교수
전문 : http://www.saegilchurch.or.kr/column/100522
담임목사가 없고 교회건물이 없고 아무 직분이 없는 공동체인 새길교회에 다니기로 결정했다.
사람 속에 있어도 스산하고 친구에게 말을 걸어도 사무치게 외롭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지” 못해서 그렇다.
바쁜 삶의 과제로 아무리 숨어도 해결되지 않는 본질과 실존 사이의 문제가 있다.
자유라고 외쳐도 자유롭지 못하고 용기라고 외쳐도 용기 있지 못한 지금의 상태로는 무한한 방황일 뿐이다.
홀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가 사람이라 마음을 나눌 공동체가 필요하다.
Trackbacks and Pingbacks on this post
No trackbacks.
- TrackBack URL
Comments on this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