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루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낸 최승자 시인
3평짜리 고시원 전전, 정신분열증에 시달려
“어떤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귀에서 환청(幻聽)이 들리고 내가 헛소리를 마구 내뱉고 있었지요.”
시인 최승자(58)의 음성에서 쇳소리가 났다. 살가죽이 겨우 붙은 얼굴과 그 속의 쑥 파인 눈, 마른 막대기 같은 몸피를 숫자로 환산하면 키 149cm 체중 34kg이 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11년만에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출간했다는 소식이다.
그간의 공백기에 심신쇠약과 정신분열 증세를 앓고 있었으면서도 시인은 시를 썼던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포항의료원에 입원 중이라고 한다. 인터뷰 자리에 외삼촌이 보호자로 따라 나왔다고 실상을 전한다.
“어느 해에는 여섯 달쯤 잠을 못 잤어요.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했고. 잠을 못 자면 소주를 마시고 쓰러져 잤는데, 나중에 심해지면서 술을 마시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았어요. 정신이 휑했지요.”
최승자 시인은 가족도 없이, 서울의 세 평짜리 고시원과 여관방에서 밥 대신 소주로, 정신분열증으로, 불면의 시간으로, 죽음의 직전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최시인의 외삼촌이 찾아내 포항으로 데려갔단다.
시집들도 베스트셀러였는데 어떻게 3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할 수 있습니까?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시가 낭송되고 있었어요. 참 좋다, 누구 시인가 혼자 이런 생각을 했는데 내 시였습니다. 한때 매스컴이나 문단에서 자주 내 이름이 거론됐어요. 하지만 실제로 시집이 많이 팔린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내 시가 인용된다고 해서 시집이 많이 팔렸다는 것은 아니지요. 시를 쓰는 것으론 전혀 생활이 안 됐어요. 나는 번역을 해서 먹고 살았어요. 영어 원서는 지금도 읽어내요. 그러다가 내가 지금의 이상한 병에 걸렸어요. 내게는 모아놓은 돈도 없었어요. 내 시와 번역서를 냈던 출판사 두 곳에서 내 사정을 알고 있었지요. 매달 25만원씩 부쳐줬습니다. 하지만 몇 해쯤 지나 내가 다시 번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이젠 안 도와줘도 될 것 같다고 내가 전화했어요. 출판사에서는 내 자존심을 헤아려줬습니다. 하지만 내 병은 깊었어요.”
“언제부터인가 귀에 환청이 들리고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하고 있었어요. 소주 말고는 전혀 음식물을 몸속에 넣을 수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서울의 한 친척집에서 지내고 있었지요. 그런 나의 이상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었습니다. 99년부터 친척집을 나와 고시원과 여관방을 떠돌았지요.”
“한때 문학은 대단하게 보였으나…, 시를 쓰는 일이 시시해졌어요. 시를 쓸수록 동어반복이 됐습니다. 다섯 권의 시집을 내면서 난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봤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도 허무하고, 내가 묶여 있는 사회와 체제, 문명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이를 초월하는 어떤 세계로 끌려들어간 것이지요. 1994년 아이오와대학 초청으로 넉달간 미국서 지내면서 점성술을 접한 것도 계기가 됐어요. 구어체 영어를 익히려고 하다가 그래 됐지요. 선정적인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오늘의 운세 같은 별자리점을 보게 됐고, 나는 쌍둥이좌인데… 이렇게 시작됐어요. 물론 그전부터 준비된 것이었어요.”
“문단(文壇)에 나오기 전부터 삶의 허무를 알았어요.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숱한 인물의 삶과 죽음들이 내게 모두 내면화된 것입니다. 누구나 다 살아가고 저마다 운명이 있지만, 결국은 허무했어요. 그때 이미 나는 세상과 운명의 본질을 다 봤는지 모릅니다.”
신비주의로 가면 “나서 죽는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영생(永生)을 원했던 겁니까?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계가 매력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쪽은 차원이 달라요. 아직도 내가 풀 수가 없어요. 그걸 추구하면서 병들어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 시집의 제목처럼 “쓸쓸해서 머나먼” 것이었지요.”
본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시를 계속 쓸 것이고, 밥만 잘 먹으면 돼요.”
최승자 시인은 5년 전부터 기초생활수급대상자였다고 한다.
최승자 시인이 3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하다가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1년 만에 시집을 내며 나온 인터뷰 기사다.
시인이 시로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없으니 다른 살궁리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를 만들고 연대를 만들거나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가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밥벌이처를 따로 차야 생계가 가능하다는 얘긴데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관계의 그물망을 이리저리 요리해서 그런 자리 하나를 만들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사람은 그런 관계를 만들 수도 없고, 만들고 나면 이미 이런 시를 쓸 수 없게 된다. 이 사람에게 밥벌이처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다.
정말로 아픈 사람은 예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픈 것을 멀찌기서 바라보는 이들이 예술을 한다.
그런데 가끔은 정말로 온 몸으로 아픈 사람들이 예술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겨우 이들의 말들을 빌려 우리 절망의 시기를 지나가지만, 그 시기를 영원히 살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로 하여금 터져나온 말들로 자기 몸을 도끼로 내리찍듯 휘젓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슬픔인가 안도인가 그러니까 우리는 잔인하다.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Trackbacks and Pingbacks on this post
No trackbacks.
- TrackBack URL
Comments on this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