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 엄마, 부모 – 자식
돌아다니다 김어준이 청소년한테 강연하는 동영상을 잠깐 봤는데 자기 부모 얘기를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김어준 어머니께서 나보다 훨씬 대장부 같으시고 정도는 더 심하시지만 어쩌면 내가 추구하는 부모상이다.
1. 김어준 엄마
자식이 “누구의 기대와 누구의 시선에 의한 삶이 아니라 그냥 본인 자신의 삶을 살게 만드는” 부모 말이다.
학교 다닐 때 공부 뒷바라지 한답시고 끔찍히 챙겨준다거나 결혼할 사람에 대해 자신의 기대를 표현하고 간섭한다거나
앞으로 먹고 살 일에 대해 본인의 어떤 기대를 표현한다거나
아무튼 자식에게 본인의 기대를 투영하고 희생하고 정성 쏟으며 살다가
결국에는 가슴 속 밑바닥에 깔린 보상심리를 포기 못하는 대한민국 많은 부모들의 삶과
아주 많이 거리가 있으신, “방목형 부모”처럼 보이지만 결코 방목형이 아닌 부모다.
이런 부모가 방목형 부모처럼 보인다고 해서 무관심한 부모가 아니다. 자식이 자기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주고 기다리며 간섭하지 않는 부모다. 이것은 무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하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이런 애정과 신뢰를 먹고 자라는 아이들은 자존감이 높아서 본인들의 결정을 본인 스스로 하고
그에 따른 불만과 불이익에 대해 스스로 감수하려고 노력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성장한다고 난 믿는다.
이런 부모를 이상적인 부모상이라고 보고 있는 내가 지금 왜 나의 자유를 포기하고 육아에 뛰어들어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미래 사회구성원을 사회에 내놓을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 –
즉 아이들 만 3년까지의 든든한 자존감의 뿌리를 세워주기 위한 노력이다.
사실 솔직한 말로 하자면. 나중에 나 편하자고 하는 짓이다. 나중에 쉽게 살려고 지금 에너지 충전하는 거다. 훗날 독립심을 가능케 하는 자존감의 기본이 영유아기 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열음이 은율이 이제 좀더 자라면 전 자유에요~” 이런 말 하면 엄마들이 비웃는다.
“초등학교 들어가서부턴 더 할 일 많아지는데? 숙제도 봐주고 시험기간도 같이 뛰어야 하고 학교 정보도 얻어야 하고! 그땐 더 바빠져!” 한다.
그건 당신들의 경우고. 걔들 할 일을 왜 내가 도와? 공부를 왜 내가?
난 내 공부, 내 취미생활, 내 할 일 할 건데?
물론 사랑 주고 신뢰 주는 부모 역할은 계속할 것이지만 아이들의 삶의 결정과 본인들의 결정에 따른 책임에 대해
좀 냉정하다시피 간섭하지 않는 부모로 살아갈 것이다.
2. 부모에 대한 객관화
사람이 인간으로서 진정 성숙하는 순간은 부모로부터 정신적 물질적으로 독립하는 순간이다.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부모를 내 부모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객관화시킬 수 있는 순간이다.
부모를 바라볼 때
“내가 효도해야 하는 대상,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라는 무게가 필요 이상 크면
이것은 부모를 객관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결혼하자마자 갑자기 효도병 걸리는 일부 남성들이 자기 아내들을 고부간의 갈등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자기한텐 애처롭고 안타깝고 끔찍히 사랑하고 죄송스런 내 엄마지만
아내한텐 그냥 남편 낳아주고 길러줬다는 의미만 있지 철저히 타인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내 부모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면 아내에게 그런 “대리효도”를 시킬 수가 없다.
그리고 부모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아내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왜 불편한 것인지.
이것은 물론 남녀 경우를 바꿔서도 들어맞는 말이다.
김어준 말대로 이런 객관화가 되면 “명절인데 왜 너는 내 조상 제사를 챙겨? 니네 집에서 가서 니네 가족하고 보내” 하게 되는 거다.
3. 아들 엄마
설이 지나고 나서 여성들 많은 커뮤니티 들어가면 설 기간 동안 남편네 집안에 가서 쥐죽은듯 일하며 남자들 술상 밥상 봐주고 돌아온 유부녀들의 홧병이 며칠을 이어진다. (사실 난 우리집안의 특성상 명절 때 몇 집 돌아다니며 인사드리는 일밖에 하는 일이 없다-.-)
가족들이 단란하게 오손도손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행복한 명절은 사실 한 사람의 침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의 침묵? 여성의 침묵이다. 여성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의견(나 이번 명절엔 우리집 먼저 갈래.)을 내놓는 순간 그 단란한 행복은 유혈혁명이 되고 곧 깨질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과 침묵으로 위태위태 이어지는 게 명절관습이란 거다.
다행인건 내가 딸 가진 엄마가 아니라 아들 가진 엄마라는 사실이다. 난 유혈사태 없이 세상을 조금 바꿀 수 있다.
내 아들들이 어떤 여자와 결혼하든 어떤 남자와 결혼하든 나는 그 사람이 내 아들과 결혼해선 안 되는 결격 사유 같은 덴 관심이 없다. 내 아들들이 선택한 배우자들의 깜냥은 딱 내 아들들의 수준이다. 지네들 인생이다.
내가 내 아들들을 잘 키웠다면 내 아들들과 서로 믿고 사랑하는 좋은 배우자를 만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자랐다면 그렇지 못한 배우자를 만나 올 것이다.
명절은 추석, 설 공평하게 양쪽 집안 한 번씩 가든지 아니면 미리 만나고 각자 여행을 가든지 다른 대안을 만들든지
아무튼 명절이랍시고 우리 집에 며느리들이 첫날부터 당연 먼저 와야 하는 문화는 내가 납득할 수 없다.
냉정하게 살려고 너는 니네 집 가라!고 하겠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침묵으로 존재하는 관습을 없애겠다는 뜻이다.
내 사전에 며느리의 도리란 건 없다. 두드러기 난다.
4. 얘들아 효도란 개념을 잊어라
아들들이 나한테 효도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다.
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랑해서 나와 친하게 지내는 것까지는 좋은데
“날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엄마라서 죄송해서 해야 하는 효도” 같은 생각은 주입시키지 않고 키울 생각이다.
효도하지 말고 사랑하라. 사랑하는 게 안 되면 그냥 어쩔 수 없다. 그 나름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다.
내가 부모로서 지금 이 순간 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건 건강한 사회구성원 둘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아이들 어린 시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내 희생을 통한 훗날의 보상이라든지 효도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효심 깊은 정신은 따져보면 (어떤 경우) 건강하지 못한 컴플렉스의 발로일 수 있다. 컴플렉스가 끼어들지 않는 사랑이라면 아름다운 일이지만
내 효심으로 인해 괴로워지는 주변 사람들을 양산하는 건 건강한 마음가짐이 아니다. 건강한 일이라면 내 배우자나 내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 리가 없다.
아들들의 효심 때문에 시부모에게 할 도리 하느라 우울증 걸리는 건 그배우자인 여성들 몫이다.(우울증 걸린 그 여성들? 내 주변에도 3명 있다.)
이런 효도는 컴플렉스의 발로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우리 뜻대로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원래 자식은 부모 뜻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이다. 내가 아이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해 노력해서 키웠어도 이 아이들의 미래는 내 뜻대로 안 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바로 삶이다. 내 기대를 배반당하는 것!
5. 착한 남편에 대한 오해
ornus와 내가 많은 부분 가치관이 비슷한데 이런 부분이 잘 맞는다. ornus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성숙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된 순간도 자신의 부모에 대해 객관화를 시킬 줄 안다는 걸 발견했을 때다.
내가 ornus의 부모의 단점을 지적하거나 ornus가 내 부모의 단점을 지적해도 서로 발끈하지 않는다.
수긍이 가면 수긍하고 안 가면 조곤조곤 대화를 할 뿐이지
“어떻게 감히 내 부모한테 그런 말을?” 그런 거 없다. 기본 도리 바라는 거? 그런 거 없다. 도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 앞에서 나는 두드러기가 난다. 인내와 승복을 바탕으로 하는 도리는 폭력이다. 서로가 편하고 즐거워야 폭력이 아닌 거다.
ornus와 내가 이룬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리 둘이고 우리 둘의 의견이다. 부모나 집안 사람들의 의견은 참고만 될 뿐 우리 둘의 중요한 의사 결정 – 결혼을 결정하고 자식 낳기를 결정하고 이사를 결정하는 – 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사실 우리도 열음이를 낳기로 결정할 때 시어르신들의 반대와 우려가 있었다. 우리를 위한 걱정이셨다. 그 때 ornus와 나의 선택은 걱정은 감사하지만 우리 아이므로 최종결정은 우리가 한다는 것이었다. 너네 뜻대로 하려면 연 끊어라! 하시는 시어머니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강력의지로 밀어부쳤던 ornus를 믿고 나 역시 어른들 앞에서 당당했다. 몇 년 지난 지금 그 어르신들이 더욱더 열음이를 이뻐해주신다. 그 때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한답시고 열음이 낳는 일을 포기했다면? 끔찍하고 공포스럽다.
모두에게 잘 하고 우유부단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남편을 착한 남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런건 바보 남편 혹은 나쁜 남편일 뿐 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모두에게 잘 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에게도 잘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이란 환상이다. 자신의 선택에 집중하고 그 선택으로 피해보는 부분을 감수해야 한다. 현명한 남편은 아내를 착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중요한 결정에 대해 부모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부모 – 아내 사이의 적절한 방패막이 되어주어, 시부모와의 관계에서 아내가 나쁜 역할을 담당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살고 싶으면 받지 말고 키워준 것만으로 만족하면 그뿐이다. 물론 한국의 시가문화란 게 안 주고도 간섭하는 사람들 천지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부부가 자신들의 의사결정에 당당한 마음가짐을 할 수 있다.
6.
설 지나고 여성 커뮤니티에 갔다가 홧병 걸린 여성들을 너무 많이 봐서 성질 나서 그쪽 얘기로 많이 빠졌다만
다시 김어준 엄마 얘기로 돌아가서.
내가 확신하건데 그 엄마 아마도 어렸을 때 김어준에게 자신도 모르게 자존감을 든든히 세워준 애정 넘치는 엄마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한테 한국형 부모처럼 간섭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던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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