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사고에

어제 낮에 일이 있어서 급히 골목길을 걷던 중이었다. 동네 조그마한 점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런 골목길.
조그마한 사거리 앞에 봉고차가 놓여있었는데, 봉고차를 못 보고 우회전하던 오토바이와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던 외제차가 가까스로 충돌을 면하며 “끽!”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외제차에서는 30대 중반쯤 보이는 남자가 내려섰고
오토바이를 몰고 가던 분은 배달 중인 물건을 뒤에 실은 60대 후반쯤 돼보이는 어르신이었다.
오토바이 어르신이 외제차 주인을 향해 “봉고차가 저렇게 서 있어서 못 봤나보네” 하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외제차에서 내린 남자의 입에서 다짜고짜 나오는 말은
“남의 차 긁힐 뻔하게 만들어놓고 지금 그따위 변명이야 이 새끼야?”

순간 갑자기 정신이 멍해져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막장 인간이라도 보통 저런 욕설은 싸움이 한창 무르익고 나서야  내뱉지 않던가.
내가 봤던 모든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책 등 내가 들었던 모든 싸움 이야기에선 그랬다.
어떻게 사고가 날 뻔했는지 얘기하는 대화의 첫마디부터 저열한 욕설을, 그것도 자기보다 한참 어르신인 사람에게.

오토바이 할아버지에게 욕설을 내뱉은 그 자의 얼굴을 나도 모르게 돌아봤다.
볼에 탐욕이 덕지 덕지. 저런 차를 몰 정도로 돈에 여유가 있다면 가슴 속엔 어찌하여 그 여유의 100분의 일만큼의 여유도 들어서지 못한 걸까.

주위를 둘러보니 모여있는 점포들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고
오토바이 할아버지, 욕설을 내뱉고 있는 외제차 주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뿐이었다.

순식간에 너무 복잡한 감정과 짜증과 서글픔이 섞여 몰려오는 중에 내 몸을 내려다봤다.
족히 한 80킬로 이상은 되어 보이는 그 남자 앞에 선 나는, 이 싸움에서 아무 보탬이 안 될 쓸모없는 여성일 뿐이었다.
 말 한 마디 던져봤자 저런 남자라면 분명히 키도 작고 몸도 작아 보이는 나같은 여성에게
“야 이년이 감히 어디서 ㅈㄹ이야”라는 욕설도 퍼부을 것이다. 육체적인 폭행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어야 했겠지만 여러 감정들이 정신없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그 눈과 마주쳤다.
살의가 가득 담긴 그 눈빛. 나는 도망나오는 심정으로 걸음을 뗐다. 어기적.
그 때서야 가게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차를 몰 정도로 물질적인 여유가 있다면 어찌하여 가슴 속엔 그 100분의 일만큼의 여유도 들어서지 못한 걸까.

그리고 뻗어간 생각은 그 외제차 주인의 부당한 언행 앞에서,
여성이 가진 본능적인 공포감 때문에 할아버지의 편을 들지 못한 나에 대한 생각.

가끔 저녁 때 골목길을 걷다가 앞 쪽으로 남자가 걸어오고 있으면 그 사람이 아무 짓도 안 하고 지나갈 때까지
가슴을 졸이며 땅만 보며 걸어야 한다.
만약 앞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술 취한 남자라면 가끔은
“이*야, 밤늦게 어딜 돌아다녀” 따위의 술기운 섞인 욕설을 고스란히 견디며 걸어야 할 때도 있다.

(비록 비실비실한 분이시지만) 남자인 ornus와 함께 다닐 때 이런 일을 겪는 경우는 전혀 없다.
남성 앞에선 감히 자신의 저열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여성 앞에선 너무나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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