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서 가능한 연주 – 수원 독주회 후기

(사진은 예당 리허설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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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이(irkala님 덕분에 우리 입에도 ‘동혁이’가 붙어버렸다-.-) 가슴 속에 한이 많나봐.”

임동혁 독주회 전국 투어 중 11번째 공연.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
바흐의 <샤콘느>를 끝내고 난 뒤. ornus가 저런다.

“저러다 쓰러질 거 같다. 전투하잖아. 가슴에 한이 많나봐”

정말 쓰러질듯이 절절하게 피아노랑 싸운다.
몇몇 이들이 후기에서 샤콘느 듣고나서 울었다는 소리 듣고 웬 과잉이야? 했는데…
앞자리라 얼굴 표정까지 세세하게 다 보였는데 너무 절절하게 쓰러질듯이.

물론 그래도 감정을 채울 때와 비울 때를, 들어갈 때와 빠질 때를 본능적으로 안다.
미친듯이 절절하게 치닫다가도 어찌나 절도 있게 음을 마무리해주고 곧장 잘 빠져나와주는지.
폭발할 듯 가다가도 빠질 때 절도 있게 빠져주던 그 순간이 더 인상깊었다.
곡이 곡인지라 강하게 쳐야 하는 순간에는 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너무 기를 빼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청중 입장에서는 황홀했다. 고마웠다. 특히나 그날의 프로그램 중 유독 ‘샤콘느’를 좋아하는 ornus는 더욱 감동먹은 듯했다. 감상평도 적어도 다섯 줄 이상 말해줬다. ornus가 어쩐일로..@.@

(이 날 공연이 끝난 후 수원공연에서 대박 내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irkala님께 살짝 부탁했는데,
“동혁이도 수원 최고였대요. 피아노도 컨디션도~” 잊지 않고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irkala님. 흐흐^^
얼마 전엔 이 주책맞은; 부부팬의 존재도 전달됐는데 우리 얘길 듣고 “히히히 흐흐흐” 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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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시작을 10분쯤 앞둔 시간 대공연장 문이 열리자마자 무대 위 피아노부터 먼저 확인했다.
전날 성남공연에서 풀사이즈도 아닌데다가 소리까지 엉망인 피아노를 연주회 중간에 바꾸는 사건까지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걱정하면서.
무대 위를 보니 스타인웨이 풀사이즈가 놓여 있다. 아. 안심이다. @.@ 나는 일단 야마하보다 스타인웨이가 좋다.

공연장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공연장이 꽤 크다. 여기가 다 찰까.
시작 시간이 되고 나서 돌아보니 공연장이 꽉꽉 들어찼다. 일단 예감이 좋다.
시작 알림이 울리고 동혁군 무대 위로 나오기 전에 문 옆에 서 있는데 웃고 있다. 아 오늘 컨디션 괜찮나보네.
문이 활짝 열리고 걸어들어와 꾸벅 인사를 하는데 일단 표정 완전 개구지고 화사하다. 안심.

그랬는데도 첫곡 <시칠리아노> 들을 때는 안심이 안 됐다.
피아노 소리가 살짝 먹히고 있는 거 같지 않아? 분명 맑아야 할 부분이 살짝 뭉툭하게 접혀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내 착각인가?
아. 이런 과도한 걱정 섞인 생각을 하며 황금 같은 <시칠리아노>를 흘려들었다. ㅠ.ㅠ

다음곡 <코랄 프렐류드> 두 곡이 연주될 때쯤 비로소 쓸데없는 걱정이 잦아들고 안정되기 시작.
(내가 연주자도 아닌데 왜 이래? 내가 연주하냐… 아이고 이 오지랖-.-)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는 오르간 연주로 주로 들었던 곡이라 피아노로 들으면 그 푸근함이 떨어질 법도 한데,
특유의 푸근하게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이 살아 있다.

<샤콘느>는 앞에도 말했듯이 거의 극도의 몰입을 보여주는 호연이었는데,
절절하게 몰입하다가도 빠질 때를 정확히 알던 그 절도 있는 절제가 소름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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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프로그램은 오직 <골드베르크 변주곡>. 시작과 끝의 아리아 두 번과 30번의 변주곡으로 총 45분 정도 걸리는 연주.
시작하는 아리아. 23세의 글렌굴드보다는 40대 후반의 굴드에 가까운, 느리고 따스한 아리아가 말 그대로 ‘좌르륵..’ 펼쳐진다.

굴드 연상은 딱 거기까지.
1번 변주부턴 임동혁 스타일이 나오기 시작한다. 당연하겠지만 특히나 5번 변주부터. 딱 임동혁의 변주다.
바흐 하면 생각나는 응축된듯 안으로 모으는 소리가 아니라 임동혁 식으로 맑고 날카롭게 펴다가 오므리며;;
아 그러니까 쫄깃쫄깃 밀고 당기며 쳐주는 그런 맛. 날카로운 대비. 냠냠 맛있다. 소리가 나오는 그런 연주.

누가 그러더라. 사람들이 익히 기대하는 바흐의 소리가 있는데, 그렇게 칠까 아니면 임동혁 식으로 칠까.
임동혁은 그냥 정직하게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식 없어 보인다고.
내 생각도 그렇다. 도무지 가식을 모른다. 자기 식대로 쳐야만 하는 인간이다.

속도가 빠른 변주 부분은 더더욱 임동혁식이지만,
21번 변주 같이 가라앉는 부분에서도 역시 임동혁 스타일이다. 어루만지듯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했지만 마지막 아리아가 흐를 때 아쉬움이 몰려온다.
어렵다면 어렵고 지루하다면 지루하다고 할 수 있는(불면증 환자 치유를 위해 작곡됐다는;;) 이 변주곡
끝을 알리는 아리아가 흐를 때, 이상하다 벌써 끝이라니, 참으로 아쉬워졌다.
아리아의 마지막 음이 끝나고 바로 일명 ‘안다 박수;’ 가 터져 나오지 않고 연주의 여운을 기다려줬다가
연주자가 일어나고 나서야 박수를 치는 ‘수원 관객들의 사려 깊음에도 감사했다. ^^

이번 독주회는 워낙 길고 체력적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을 것이기에 앵콜 잘 안 했다는데,
커튼콜 세 번 후 아주 화사하게 웃으며 다시 앉는다.
예상했던대로 앵콜곡은 차이코프스키 <6월>이다. 역시 낭만주의 곡 할 때 그는 감탄스럽다. 어찌 저리 녹일까.
ornus는 이 곡만 들으면, “러시아식 특유의 애잔한 민속적인 선율을 클래식에 잘 버무린 이런 곡이 우리나라에도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곡만으로도 괜찮았는데 커튼콜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한 곡 더. 아마 수원공연에서만 앵콜 두번이었을 걸? +.+ 
<겨울연가>OST 중 하나인 ‘처음’. 이런 말랑말랑 대중적인 곡도 참 이쁘게 잘 한다. 녹아내리지 녹아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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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바흐는 젊은 피아니스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대세를 따랐으면 자칫 임동혁의 바흐도 아주 먼 나중에 중년 이후;;의 해석만 들을 뻔했는데,
젊은 임동혁의 바흐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좋다.
굴드도 임동혁과 같은 23살 때 <골드베르크>를 녹음한 이후 25년 후에 다시 녹음했었다.

이번 독주회가 끝나면 동혁군도 런던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3집 앨범 녹음 들어간다고 한다.
13회의 독주회를 통해 조금씩 다듬어진 부분은 있겠지만 지금의 연주는 23살 임동혁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연주다.
내가 이번 독주회에서 기대했던 건 아직 젊고 말랑말랑하고 치기가 남아 있는 시기 임동혁의 <골드베르크>다.
기대대로 됐고 고마웠다. 훗날 해석이 달라지면 어떻게 될까. 그건 훗날을 기다리면 된다.

임동혁의 연주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숨길 줄 모른다. 숨겨지지지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할까.
그는 숨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연주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쉽게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동혁 같은 스타일은 항상 손해만 본다.
사실 그는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 어린 아이 같다.
자신의 취약 부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꾸 노출시키는 그런 타입. 이런 타입들은 자기조율이 잘 돼 있는 이들에게
종종 배반당한다. 그래서 나는 동혁에게, 그리고 그의 연주에 한없이 정이 가는 것이다.
이런 타입이 저지르는 실수를 항상 내가 반복하고 살기에;;

 
(요 사진에서 풍기는 느낌이 참 좋아서. 작년 차이코프스키 콩쿨 때, 왼쪽은 벤자민, 가운데 동혁, 오른쪽 김성훈^^)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조율하고 어떤 식으로 바이오그래피를 다듬어야 하는지 ‘거장으로 가는 1번 공식’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또래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애늙은이 같은 수재 스타일이라면,
확실히 임동혁은 숨길 수 없는 천재 스타일이다. 사실 난 천재란 말을 좋아하진 않는다. 
이 말 속에 숨은 행간 – 엄청난 노력과 좌절 등 – 을 다 공중분해시키는 성의 없는 단어 같아서. 그래도 어쩌겠는가.

가슴에 쌓인 한을 쥐고 있다가 풀어내듯 절절했던 <샤콘느> 반복해서 듣고 싶다. 
예당공연은 KBS에서 녹화해 갔다니 방송을 기다릴 수밖에..

Comments on this post

  1. white said on 2008-03-03 at 오후 1:16

    멋진 글! 동혁님 연주회 난 언제나 가보나.. 흑.. ㅠ_ㅠ

  2. wisepaper said on 2008-03-03 at 오후 1:23

    동혁님이라고 하니까 아이고 ㅎㅎㅎㅎ ‘동혁군’ 정도가 어울리는뎈 ㅋㅋ

  3. ornus said on 2008-03-03 at 오후 1:40

    동혁이의 샤콘느 연주는 정말로 한을 품은 사람이 울기 직전인거 같은 느낌이었다,

  4. irkala said on 2008-03-03 at 오후 7:42

    크흑 후기 근사합니다. 저는 후기를 쓸라쳐도 그저 안됐다는 생각에 피곤해 하는 얼굴만 어른거리는데…^^ 하여간 제가 안간 연주회들만 다 잘쳤다니까요. 일부러 그러는게 틀림없어;;

  5. wisepaper said on 2008-03-04 at 오전 12:16

    제가 irkala님이라고 해도 후기 쓰기 힘들 거 같아요. 근데 저도 점점 그 증상이 나타납니다.

  6. white said on 2008-03-04 at 오후 5:05

    빼빠/ 내가 가기 싫어 안 간게 아니잖았! 나도 속상하다 모!! ㅠ_ㅠ

  7. irkala said on 2008-03-04 at 오후 7:55

    빼빠 / 헉…. 방금 연락왔는데…머리 더 짧게 잘랐답니다….-_- 재미들린거냐???

  8. wisepaper said on 2008-03-04 at 오후 11:38

    수원 때 본 것두 너무 짧아서 헉 했는데, 또 자르다니..길어서 앞머리 살짝 내려주는 게 더 낫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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