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아이가 태어나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얘기할 때까지 우리는 적잖은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맘마. 음마” 같은 그나마 단어로 말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이르면 8개월,

돌 지나서 단어로 우물쭈물하다가 문장을 말하기 시작하는 건 15개월 무렵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평범한 의미있는 문장으로 큰 무리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하기까지는

아이에 따라서 24개월 혹은 36개월 정도를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

아직 세상에 나온 지 석 달이 채 못 된 은율이는 내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품고 말을 걸어주면

자기도 뭐라뭐라 말하는데 입에서 나오는 건 “아웅.. 아.. 옹냥.. 웅..” 뭐 이런 암호 같은 소리다.

막 세상에 태어난 신생아는 이런 의미 없는 소리조차도 내뱉지 않는다.

우리에게 암호 같은 소리나마 내뱉기는커녕

어디로 생각이 가닿는 건지, 어디로 초점이 가닿는 건지 알 수 없는 반 쯤은 텅 빈 듯한 표정을 한 채

아기의 시선은 우리의 눈빛이 있는 곳으로 정확히 향하지조차 않는다.

우리의 근원이 시작된 곳, 우리가 떠나온 세상에 대한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이 아기들이

오랜 시간 동안 우리에게 언어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 내게는 의미심장한 일로 다가온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세상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 지날 무렵이 되어야

우리와 함께 속세의 언어로 대화하기 시작한다.

재밌는 건 이 때쯤이면 말 못하고 누워있는 아기들 특유의 어리숙한 표정 – 천지가 분간이 안 되는 듯한

아니면 천지분간은 자기일이 아니라는 듯한 – 도 얼굴에서 거의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아기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우리 생의 비밀과 좀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그러나 비밀이 훤하게 드러난 삶을 생각하니 또 쓸쓸해진다.

아기들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세계의 비밀을 전해주지 못한 채 사람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오후 햇빛 받으며 누워 있는 은율이에게 가만 가만 말을 걸어보는데

이런 생각들이 가물 가물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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