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나는 인문학 전공자이자 어쩔 수 없는 인문의 향기에 매료된 사람이다.
다른 분야의 책들도 읽곤 하지만 영혼이 제일 깊게 흔들릴 때는 역시나 인문학적인 글을 읽을 때다.

ornus는 공학 전공자이자 어쩔 수 없는 공학 빠돌이란다.
그도 (아주 매우 가끔 아주 매우 가끔;;) 다른 분야의 책들도 읽고자 하지만
역시나 졸면서도 손에 붙들고 있는건 공학 관련 책들이고, 아주 가끔은 수학 관련 책들이다.

나도 ornus도 특별히 머리가 좋다거나 남과 다른 기발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다만 끊임없는 열정과 호기심은 있어서
사는일에 찌들리면서도; 이런 분야에 골몰해 있을 때 가장 정신이 맑아진다는 느낌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서로 전혀 다른 것 같은 분야의 책을 읽지만 우리는 대화를 자주하는데
살아갈수록 내가 나의 책들에서 얻은 지혜와 ornus가 자신의 책에서 얻은 지혜가 통하고 있어서
대화가 잘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ornus가 요즘 생각하는 건 공부하다 보면 자신은 대충 네 가지 단계를 밟는다는 것이다.
1. 어? 저게 뭐지? 끌린다. 알아보고 싶어 – 호기심의 단계
2. 조금 공부해보니 재밌다. 뭘 좀 알 것 같다. – 첫번째 확신의 단계
3. 더 파고들다보니 어렵다. 내가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과연 신기루였던 것인가. – 좌절의 단계
4. 3단계 이후 다른 일을 하면서도 곱씹고 곱씹다보면 어느 순간 영안이 뜨이는 것처럼 좌절에 부딪혔던 개념이 확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 – 도약이 이뤄지는 단계

그는 자신이 3단계에서 머물고 있을 때 고민이 가장 많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고민을 한참 듣더니 나 역시 3단계에서 나의 질문에 천착해서 끝까지 파고들어야 하는데
너무 잡다한 관심거리와 주제들을 자꾸 공급받다보니
무르익을 시간이 부족해보인다는 것.

어느 부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4단계는 잡념이 사유로 변하는 순간이다.
쉽게 말해 잡념을 가지고도 사람은 글을 쓸 수도 있고 작품을 만들 수도 있고 입담을 과시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붙들고 있는 인간에 대한 질문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나름의 사유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의 글은 진심의 위로가 되고 다른 누군가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문장도 마찬가지.
문장을 좀더 유려하게 만드는 재치 있는 미사여구도 자신이 구축하고 있는 사유의 세계를 확신하고 있을 때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을 경우엔 그저 울리는 악기 소리처럼 공허할 뿐이다.
(고린도전서식으로 하면,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을 뿐인 거다.)

요즘은 그래서 어떤 근원적인 질문을 계속해서 붙들고 천착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작가들의 글들에 관심이 간다. 물론 그들이 내가 어떤 질문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것은 그들의 작품이 말하는 것이다.

ornus의 말에 따르면 공학도 일면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 어떤 것은 다른 구조 안에서도 가치가 있는 좀더 근원적인 해법인가 하면 어떤 것은 오직 그 구조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해법일 수 있다는 것.
회사일에 세상일에 찌들어 살다가도 좀더 근원적인 해법이 보이는 문제풀이를 볼 때 자신은 희열을 느낀다고.

ornus의 언어와 나의 언어는 다르지만 각자 자기식대로 자기 얘기를 하면서도 그럭저럭 대화가 이어진다.
(사실 어쩌면 그저 자기 얘기를 하는 것뿐일 수도 있다.)
ornus도 나와 같은 분야에 매료돼 있어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좋았을까.
글쎄 나는 그것은 내가 읽는 책들, 내가 만나는 수많은 작가들과 누리는 소통으로 충분하다.
ornus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 내게 선문답 같기도 한 뜬금없는 답안지를 내밀 때가 있는데 그게 재미를 준다.

어찌어찌 고생해서 애 둘을 재워놓고 커피 한 잔 마시며 각자 자기 얘기를 하지만 묘하게 통하는 잠들기 직전의 이런 대화 시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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