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주워담으며, 잡념이 사유로 변하는 순간
책을 읽어도 문장이 가슴에 내리박히지 않고 무엇을 해도 심드렁하고 재미가 없다는 글을 쓴 지가 엊그제 같은데
요며칠새 몇 년 만에 극장에서 영화 몇 편 -<블랙 스완>과 <파수꾼>- 을 보고 나서 받은 자극 때문인지 욕망들이 일렁이고 있다.
그리하여 은율이를 유모차에 눕혀 재워 내 컴퓨터 책상 옆에 슬며시 데려다놓은 채로 이 시간까지 알라딘 장바구니에 책 27권을 담고 주문하기 링크를 막 누르려 하고 있다.
이번엔 영화에 관한 책들을 주로 골랐다.
정성일, 허문영, 김영진, 이동진, 김혜리의 글을 몇 개씩,
그리고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도 슬쩍 끼워 넣었다.
김승옥의 글을 새 책으로 다시 읽고 싶어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이 들어있는 단편집과
이승우의 소설도.
책들을 고르며 그들의 문장들을 읽어가며 뱃속에서 이렇게 꿈틀꿈틀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는 데에 안도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둘다 김승옥의 글이다. <무진기행>
…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그리고 우리가 무수히 겪은 불면의 밤을 묘사하는 이런 문장.
어디선가 한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두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세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네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에 통금 해제의 사이렌이 불었다. 시계와 사이렌 중 어느 것 하나가 정확하지 못했다. 사이렌은 갑작스럽고 요란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길었다. 모든 사물이, 모든 사고가 그 사이렌에 흡수되어갔다. 마침내 이 세상에선 아무 것도 없어져 없어져버렸다. 사이렌만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 그 소리도 마침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계속할 것 같았다. 그때 소리가 갑자기 힘을 잃으면서 꺾였고 길게 신음하며 사라져갔다. 어디선가 부부들은 교합하리라. 아니다. 부부가 아니라 창부와 그 여자의 손님이리라. 나는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에 나는 슬며시 잠이 들었다.
남성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보다 더한 근원적인 공명을 얻는 건 오정희의 글을 읽을 때다. <옛우물>
기름이 뜬 미역국과 흰밥으로 차려진 밥상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잠든 사이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다는 것을 알았다. 안방에 건너가면 윗목에 한아름 꿍쳐 있는 수상쩍은 피빨래와 짚더미. 아기는 우리가 차례로 입었던 배냇저고리를 우리가 막 벗어산, 혹은 지나온 작은 생처럼 물려 입고 밤을 지샌 고통, 피와 땀과 젖냄새가 비릿하고 후덥덥하게 뒤섞인 공기를 마시며 잠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뒤란으로 돌아가 피묻은 짚과 태를 태웠다. 우리가 떠나온 세계는 시커먼 연기와 검댕이로 피어올라 할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은 정화수 흰 대접, 옛날의 우물물에 날아 앉고 그렇게 우리는 영원한 암호, 비밀일 수밖에 없는 한 세계와 결별한다.
…….
낮에는 잠깐 몇 명의 작가, 소설가, 영화감독들이 말하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그들은 한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를 쥐고 중간쯤 아무데나 펼쳤다가, 소설가 은희경의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은희경은 내 생각보다 꽤 된 나이에 등단을 했는데, 등단하기 전 10여 년 간을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며 무수한 잡념 속에서 불안한 채로 살다가 “자신의 잡념이 사유로 변하는 순간”을 만났다고 했다. 그 이후 절박한 심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이 소설이 되었다고 했다.
잡념이 사유로 변하는 순간이라..
내 안에 있던 이야기를 글로 써낼 단서를 찾아내는 순간,
고른 각도로 놓인 경사지의 연속을 걷는 게 아니라 계단을 하나 확 오르듯 이전과 단절하며 도약하는 인생의 어떤 순간을 말하는 것일까.
내 안에 있어 진짜 내것이라 할만한 것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지금 내 시간들을 살 수 있는 한 최대한 살아보고 싶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사람이 사람으로 성장하는 순간들을 충분히 바라보는 일을 포함해서 말이다.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도 추가한다.
아참..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영화에 미쳐 있어서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그 영화를 만든 감독조차 결코 의도하지 않은 세계에까지 다가가는 글쓰기를 해온 정성일의 평론집이 이제서야 나왔다는 건 의아한 일이다. 그라면 지금까지 이런 저런 미디어에 발표한 자신의 글들만 모아도 벌써 수십권은 냈을 만한 사람인데. 그는 왜 여태껏 평론집을 내지 않았을까. 그는 시간을 견디는 것은 영화이지 평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평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늘 새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 책을 낸다는 것이,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사유의 정지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굳이 내야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쉽게 글을 묶어 책을 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쓰인다.
아무튼 그리하여 이번에 나온 평론집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와 <필사의 탐독>이다.
제목이 참 근사하지. 빌려온 표현이라고 하긴 하지만 그다운 제목 선택이다. 참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싶은 중량감이 느껴지는 표현들 말이다.
그러나 이런 과한 제목들도 그의 글쓰기를 보면 수긍이 간다. 그라면 수많은 영화들을 삶을 살듯 필사적으로 탐독했을 것이고 그러니 정말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밤을 샜고 아침이 오고 있다. 홈피 시계는 고장이 났나 싶다. 은율이의 다음 수유 시간이 오기 전 빨리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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