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아이의 죽음
1. 한 작가의 죽음
“격정소나타”라는 단편영화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단편영화의 얼굴” 상을 수상했고, 영화 시나리오를 5편이나 계약중이었던 영민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갑상선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다가 굶주림으로 죽음까지 갔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왕성하게 작업중인 작가에게 정당한 수익배분이 이뤄지지 않는 악습, 그리하여 보통 젊은 창작욕구와 꿈을 저당잡아 간신히 붙어 있게 만드는 영화판의 관행도 문제라 하고, 다른 밥벌이를 찾아보지 않은 개인의 잘못이라고도 하고, 글만 쓰는 작가에게도 매달 일정액씩 정부 보조금이 나와 결국 국가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작품(해리포터)을 쓰는 걸 가능하게 하는 복지가 없는 게 문제라고도 한다.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만 이 일을 다른 밥벌이를 찾아보지 않은 개인의 잘못으로 몰고 가는 건 부당하다. 나도 임신중에 갑상선 항진을 앓은 적이 있는데, 이 병의 증상은 무기력이다. 무기력해서 일은커녕 밥 한 술 뜨기도 싫은 순간이 온다. 작가의 길을 가고 있는 한 개인이 자신의 지병을 개인의 힘으로도, 가족의 힘으로도 해결하지 못했을 때 사회가 이 역할을 떠맡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다른 밥벌이로 딴주머니를 차고 있어야 작가로 사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슬픈 일이다. 나는.. 작가란, 예술가란 이런 종류의 밥벌이들과 끊임없이 불화하게 만드는 어떤 기질로부터 솟는 욕구로 인해 존재하는 부분이 어느만큼은 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있던 작가가 지병으로 고통받다가 홀로 아사까지 같는데 이것이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
이 작가가 1979년생이라고 한다. 나와 나이가 같다. 나는 이 죽음이 나의 죽음처럼 읽혀졌다. 청춘의 죽음처럼 읽혀졌다. 오늘날 청춘들에게 도전하라고 말하는 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는 곳에서 공중곡예를 하라는 말처럼 무책임하게 들린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최작가만큼의 재능이 없었기에 일찌감치 꿈을 접고 생활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여전히 그런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가능한 건 내가 어떤 사정으로 밥벌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내 밥벌이를 해줄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개인의 사정일 뿐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개인의 사정은 사고 나면 언제고 잘못될 수 있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끈일 뿐이다. 어떤 청춘은 집안의 재산 뒤에서, 어떤 청춘은 부모의 뒷받침 뒤에서 도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개인의 사정은 개인의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미 죽은 청춘들은 언제든지 또 죽을 수 있을 것이다.
2. 한 아이의 죽음
홈피에 링크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210082307888&p=yonhap
를 거느라 어쩔 수 없이 기사를 꼼꼼히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이 일을 처음 알게 된 이후 여러 개의 기사를 검색해놓고도 가슴이 떨려서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잔인한 기사들의 한 줄 한 줄을 다 읽고 나면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글 줄 하나하나 정독할 수다 없었다.
아프고 무섭다.
세 살 아이를 때려 죽음으로 몰고 간 막장 부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문제 있는 개인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정말 문제는 문제 있는 개인의 손에 크고 있는 한 아이를 우리 사회가 구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이의 울부짖음을 매일같이 들었다는 이웃도, 아이의 멍든 몸을 자주 보아왔다는 어린이집 선생도 이 작은 아이 하나를 구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이 아이를 폭력적인 부모로부터 격리해 보호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므로 이웃이 개입해서라도 이 아이를 학대로부터 구출하는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이 있었더라면, 이 아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아무리 부모 개인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해도, 이 잔인한 어른에 대한 분노를 어찌할 수가 없다.
세 살 아이라면 경우에 따라 겨우 13개월부터 35개월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작은 존재다.
부모는 한 아이의 우주다. 그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의 전부다. 아이가 기댔던 우주같은 전부가 그 아이를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니. 볼기짝 한 대만 때려도 전해지는 서러움에 가슴이 찌릿찌릿한데,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한 아이가 겨우 2년 남짓 되는 생애 동안 아픔에 울다 갔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진다.
우리가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미안해서 미칠 것 같다.
… 여기는 작가와 아이가 죽어나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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