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마음보다 정직해

얼마 전부터 간헐적으로 가슴에 쿡쿡 거리는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지난 주말 쯤..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아무 생각 없이 팔을 올리려는데 무섭도록 생경한 통증이 확 퍼지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시간이 흐르면 별거 아닌 것으로 잊혀지는 게 대부분이지만, 이런 식으로 어느 순간 제 존재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지경에 이르면 계속해서 무신경하기가 쉽지 않다.

내 가슴에 생길 수 있는 일이라..
나는 유방암과 같은 몇 가지 여성형 질병을 떠올렸고, 만지면 딱딱하게 잡히는 이것들이 과연 악성 종양일까 아니면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 그저 유선조직인 것일까 하는 두려운 의문을 품고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갈 데까지 가보았다.
암에서 죽음까지.

물론 집으로 오자마자 찾아본 여러 정보를 종합해볼 때, 암은 통증으로 징후를 알아차릴 수 있는 질병이 아니며 통증으로 알아차릴 단계라면 이미 말기이므로 이전에 적나라한 여러 징후를 많이 겪었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암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통증의 경우 많은 여성들에게 생리주기 호르몬 변화로 인해 주기적으로 찾아오거나 기타 요인들로 인해 비주기적으로도 찾아올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암이 아니라면 섬유선종이니 뭐니 하는 이름을 붙일 만한 양성종양일 것이며 필요하다면 수술을 할 수도 있겠지.

그래.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저 이런 결론에 이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 맘이 어찌 그런가..-ㅠ
이제 쏟아지는 가을햇빛은 어제와 같은 그 햇빛이 아닌거다. 걷는 이 거리도 어제 걷던 그 거리가 아닌거다.

검사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을수도 있을텐데, 결과도 모른채 어떻게 훈련소로 들어가냐며 한숨짓는 ornus에게는,
꽃미남 선생님 있는 데로 갈거라는 괜한 말로 너스레를 떨며 병원을 예약했다.
엄마처럼 푸근한 인상의 경험 많은 여자 선생님이 있는 클리닉으로.

검사용 가운을 입고 초음파 검진을 위해 침대에 누웠다.
부드러운 로션을 발라 따뜻하게 쓰다듬으며 진료를 진행하는 선생님의 말투가 포근하다. 
“아유.. 이 화면좀 봐. 온통 어둡네. 유선조직의 밀도가 너무 높아. 이러니 누르면 많이 아팠을 거야.
근데 가만히 있을 때도 느껴진 통증의 원인은 뭐였을까?” 

선생님이 그 간헐적인 통증의 원인을 유추해보려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쪽 질병에 관한 가족력도 없고, 술도 안 마시고, 병 유발 요인이 되는 건강보조제나 여성호르몬 과다로 문제를 일으킬 만한 뭔가를 먹은 적도 없고, 좋아하는 음식도 채식 위주라는 내 대답.

“…. 근래에 특별히 스트레스 받은 일이 있어요?”
아아..스트레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복이다. 항복. . 스..트..레..스..

몸은 마음보다 정직하다. 또한 참으로 섬세하고 신비롭다.
몸은 내게 일어난 일들이 넘치면 넘친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정직하게 일러준다.
몸살로, 두통으로, 복통으로 내게 오던 그 정직한 신호들이 이번엔 참으로 생경한 모습을 하고 다가와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마음의 고통의 임계치를 알려준 것이다. – 여기서 더 나아가지 말아라. 

침대에 누워 초음파 화면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참으로 미안해져 왔다.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
그리고 내 곁의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올라온다.
내 어둠 내 비루함마저 햇살처럼 이쁘게 여겨주는 이를 곁에 두고도, 나는 얼마나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했는지.

유선조직의 밀도가 남들보다 훨씬 높다며 이런 경우 암 발병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과, 초음파상에 잡힌 작은 혹은 염려할 수준은 아니고 몇 년 간 정기검진을 받으며 지켜보면 되니 안전하다는 소견을 듣고 병원을 나왔다.
오시지 말라고 말려도 굳이 달려온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크게 웃어 보았다.

내게 그만 하라고 아프다고 말해주는 이 기특한 몸에게 내가 무슨짓을 한 거야 대체.
‘네게 더 너그럽고 후해질게. 좀더 둔하고 좀더 단순한 응원으로 챙겨줄게.’

(+)
1. 흔히 여성들에게 좋다고 알려진 (석류 같은) 것들은 폐경기의 여성에게는 여성호르몬 보충제가 될 수 있지만,
젊은 여성들에게는 여성호르몬 과다를 일으켜 암 유발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함.

2. 정기적인 암 검진은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시간도 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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