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보내고 나면


여름은 커다란 통 속에 들어 있는 화려한 꽃다발 같다.
닫힘없이 열려 있다. 세련되었고 소박하다. 

애오이처럼 신선하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을 전염시키는 계절이기도 하다.

시들지 않는 꽃과 같이 영원히 멈춘 것처럼 사람을 집중시키다가
어느덧 가버리는 게 여름이다.

한없이 게으름을 부려도 좋을 것같이 긴 것 같으나
금세 입추를 맞이하게 되는 계절이다. 

아직 가을 겨울이 남아 있는데도 여름을 보내고 나면 한 해를 다 살아버린 듯하다.
돌아오는 가을은 짧고 겨울은 다음 해와 섞여 있는 탓일 것이다.
그래서 한해 중에 여름을 보내고 나면 시간을 뭉텅이로 도둑맞은 느낌이 든다.

신경숙, ‘자거라 네 슬픔아’ 중에서


이맘때쯤 낮의 햇빛은 여름 햇빛과 달라서 물기가 없이 쨍하다.
일 년 중 가장 두근대는 시기이기도 하고, 무언가 아쉽고 허전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힘자랑하던 더위도 물러가고 벌써 선선한 바람이 살갗에 닿는 느낌에 놀라,
그가 입을 포근하게 짠 가디건과 스웨터를 사 가지고 들어왔다.
밤에 잠들기 전에, 아침에 입고 가라며 보라색 깊게 파인 니트에 하얀 티를 받쳐서 내놓았다.
“보라색…좀..야한 것 같은…데에….” 하면서 말끝을 흐리더니, 입고가긴 했나보다. ^^

이번 가을은 9월과 11월 딱 두 달만 있는 것 같다.
10월은 ornus가 훈련소에 들어가 있는 달이기 때문에, 내 가을 셈에서 자꾸 빠진다.
올해 10월은 왠지 달력에서 쑹덩 빠져나가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9월에 더 열심히 가을냄새를 맡기로 했다.
10월 긴 연휴 때는 부모님,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 많은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

그가 돌아오면 금세 시린 바람 불고 어느새 겨울 되겠지.
그럼 또 한 해가 가겠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중에 겨우 두 계절을 떠나보냈으니 두 계절씩이나 남은건데도,
이렇게 여름을 보내고 나면 한해가 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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