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

오늘 새벽 한 시쯤 서태지닷컴에 한 팬이 유서를 올렸다.

가족에게 진절머리나는 상처를 받은 듯 했고, 자신은 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사랑하던 서태지와 소중한 팬들이 있는 곳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로그아웃해버렸다.

남아 있던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이미 오프라인인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유서의 조회수가 올라가고 수백 개의 리플들이 달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죽고 싶을 때가 있는 거라고. 우리도 그랬다고. 살아보라고, 돌아오라고…난리를 쳤다..

평소에 글을 알던 몇몇 팬이 전화를 해보았지만, 핸드폰도 꺼진 상태였다. 서태지닷컴 마스터에게 연락을 취해서 그가 안산에 산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몇몇 팬들이 그 새벽에 안산으로 가겠다고 했다. 당장 그를 말리러 안산으로 갈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경찰에 연락을 취해야 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수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그를 위해 글을 썼다.

평소에 그를 알던 한 사람이, 그가 최근 들어 부쩍 우울해하고, 힘들어했다는 말을 하며, 더 잘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몇 년 전 자신의 동생이 자살한 이야기를 꺼내며, ‘동생이 죽기 전 자신에게 사는 게 힘들다고 볓 번이나 말했는데, 자신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얼마 후에 동생이 떠났다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위로 속에서 간혹 어떤 사람들은 ‘죽으려면 조용히 갈 것이지, 왜 공개적으로 저러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절대적으로 옳지 못하다.
조용히 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유서를 남기는 것은 ‘나의 죽음의 이유를 알아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길’ 바라는 것이며, 자신의 의미를 간절히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자살행위 자체가 ‘나를 좀 보아달라’는 마지막 퍼포먼스인 것이다.

….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로그인을 했다. 살겠다며. 자신이 살길 바라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보고, 죽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며.
“나의 가족은 내 집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들”이라고.

그는 작은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나약한 인간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공개적으로 글을 올려 자신을 살려달라고 말 해 준게 고맙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죽고싶은 이유들이 생길지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이 죽지 않기를 바래 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단 한 명만이라도 있다면, 그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한 팬이 서태지의 노래 [수시아]를 듣고, 자살하려던 결심을 접었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적이 있었다.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태지가 끊임없이 [Take three] 같은 곡에서, ‘죽음을 이기는 힘’에 대해 노래했던 이유를. 어떤 이에게는 우스운 일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한마디와 노래 하나가 정말 사람을 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Comments on this post

  1. Glaukopis said on 2018-01-10 at 오전 8:11

    어감이 굉장히 이상하지만, “유서의 미학” 이라는게 존재할까요? 우리는 왜 자살할 때 유서를 남길까요. 우리의 존재와 삶 자체는 예술인데, 그 예술적 행위를 끝내면서도 끝끝내 글을 남김으로써 창작 행위를 하는거잖아요. 삶을 스스로 끝내는 어떤 사람들은 마치 항소사유서를 쓰는 것처럼 왜, 누가, 어떤 상황이 고통의 원인이었음을 쓰기도 해요. 예견된 죽음을 앞둔 어떤 사람들은 전자기기 메뉴얼 혹은 컴퓨터 명령어처럼 사람들에게 (일방적이니까 동시에 명령에 가까운) 자신의 마지막 메세지 혹은 부탁을 남기곤 해요.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보편적으로 숭고하다 여기는 가치와 연관되었기에 함부로 논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과연 그것은 존재할까요?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접근해야할까요?

  2. wisepaper said on 2018-01-10 at 오전 8:19

    내가 최근에 쓴 ‘인간의 의미 그 깊이까지’ 여기에 달린 리플을 보면 심은하님하고 나눈 대화가 있거든. 자살 중에 정말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이른 경우도 있지만, 난 요즘 자살을 적극적 삶의 의지의 차원에서도 해석하고 싶더라고. 너의 이 리플을 보니 넌 소설가 데이빗 월래스(David Foster Wallace)가 자살하면서 남긴 아름다운 글을 꼭 읽어봐야 겠다. (내가 예전에 읽었는데 지금은 못찾겠어. 아마 검색하면 나오게 될 거야) 그런 글은 ‘유서의 미학’에까지 이른 글이겠지. 그런 자살의 경우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삶’보다 오히려 적극적인 삶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거야. 죽음의 행위 자체가 삶의 강렬한 에너지일 수도 있다는 것. 그 사람의 평소 생각과 가치관이 결국 삶을 죽음으로 끝맺게 했다면 그 유서까지 그의 작품의 일부가 되겠지.

    • Glaukopis said on 2018-01-10 at 오전 8:38

      아! 그 글 알아요. 고등학교 때는 되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한테 저렇게 좋은 말을 하고 왜 죽음을 선택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아 이제야 알겠어요. 여담인데 생각하는 와중에 건물 안인지도 모르고 지하1층에서 건물 밖에 나올 때까지 우산을 쓰고 나왔네요. ㅋㅋㅋㅋ 미쳤나봐요.

  3. wisepaper said on 2018-01-10 at 오전 8:39

    하 ㅋㅋㅋㅋ 건물 안인지도 모르고 우산을 쓰고 나온 순간. 지극한 몰입의 순간. 자유의 순간 아닐까? 자유를 체험한 너에게 박수를 쳐줄게 ㅋㅋㅋㅋㅋ

  4. Glaukopis said on 2018-11-17 at 오전 6:18

    이 글을 지금 다시 읽게 될줄은 몰랐어요. 문득 이 글을 처음 읽던 순간이 떠올라요.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나약한 존재에서는 미약하게나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의미한 시간들을 가치있게 채워나가는 곧은 붓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어려울 때도 많아요. 누군가는 구원받고, 누군가는 버림받죠.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모르겠어요. 나의 존재에 대해 다시 의문이라는 돌멩이를 던지고 있고 돌멩이로 가득찬 마음의 호숫가는 고요히 무거워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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