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요즘은 참 쓸쓸하다.
온몸이 구겨진 채로 하루 종일 고종석의 <서얼단상(개마고원, 2002년)>을 읽었다.
사르트르가 지난 세기 64년에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매일매일 어린아이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세계에서 문학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구토>마저 그렇다면 신소설 나부랭이야 더더구나.
장 리카르두의 반박: “문학은 인간을 다른 것과 구별짓는 드문 행위들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 다양한 고등 포유류와 구별되는 것은 문학을 통해서다. 인간에게 어떤 특별한 얼굴이 그려지는 것도 문학에 의해서다. 그러면 <구토>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과 다른 위대한 작품들)은, 단순히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어린아이의 아사(餓死)가 추문이 되는 공간을 규정한다. 이 책은 그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세상 어딘가에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 어린아이의 죽음이 도살장에서의 어떤 동물의 죽음보다 더 중요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르트르도 옳고 리카르두도 옳다.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구토>를,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런 깨달음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문학이 있어서, 주린 어린아이의 죽음은 추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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