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를 둘러싼 폭력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내게 악수를 청하지마/ 내겐 당신과 악수할 또 다른 손이 없어/…/ 내 손을/ 정말 좋은 사람들에게만 내밀고 싶은 거야”(‘악수’) 하며 세상에 대해 뭔가 단단히 마음먹은 속내를 드러낸다. 그는 90년대를 ‘환멸의 시대’로 정의했다. …. ‘서태지’란 시에서는, “그 분이 나타나셨다/…/ 이곳에 제발/ 왕림하지 마옵소서/ 마포구 용강동/ 이 누추한 곳에”라고도 했다. “

윗글은 정태춘 씨의 새 책에 대한 조선일보의 기사 중 일부분이다. 알 만한 사람은 어느 정도 알 만한 가수로서 정태춘 씨의 미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사전심의제 폐지를 위해 애썼던 그 분의 지난한 노력에 대해서도.

 내가  저 글을 보고 느꼈던 첫 감정은 “모두 같아 같아 같아([제로]의 일부분)”를 외치는 서태지의 현기증 쯤이었을까.
아니, 내가 서태지의 현기증이 어느만큼인지,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해 값싼 추측 따윈 하지 말자. 그것보다 더 정직한 감정은…”‘환멸의 시대’ 90년대에 십대를 보내고 대학을 다닌 나는, ‘환멸의 자식’쯤 되는 걸까?” 하는 조소였다. 누구든 나름의 방식으로 시대를 파악할 자유는 있다. 6,70년대,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90년대를 온전히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패배의식이 훗날 2000년대의 아이들을 평가하는 나도 역시 저지를 수 있는 감정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작가는 환멸의 시대의 상징쯤으로 서태지라는 시어를 고르고 흐믓했을지 모르지만, 그 시어가 가진 다의적인 의미들을 배반함으로 해서 소외당하는 영역이 크다면, 시어의 폭력이 아닐까.

저런 글들에 여전히 상처받는 팬들에게 누군가가 던졌던 말은, ‘서태지’란 이름은 단지 상징일 뿐 감정이입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상징으로 이해하면, 서태지가 아프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시대의 상징쯤 되어 버린 ‘서태지’에 대해서 그 서태지는 어떠한 생각을 할까. 문득, 커튼으로 창문을 가린 방 안에서 혼자 기타를 잡고 있는 한 명의 음악 청년 ‘서태지’가 궁금해진다.

나는 서태지를 보면 뜬금 없이 그런 풍경들이 떠오른다.
초등학생 서태지가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고 비행기를 날렸을 삼청동 정독 도서관 주변 어느 골목.
중학생 서태지가 하교길에 뚫어지게 쳐다봤을 낙원상가 악기점의 쇼윈도우.
고등학생 서태지가 기타를 들고 전전했을 수유리와 퇴계로와 이태원의 허름한 바(Bar)들.
그리고 ‘가수’ 서태지가 거쳐 왔던 지난한 90년대의 현실들과 진저리나는 그 싸움들. 경박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90년대를 살아간 서태지의 고통을 7,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 거라고, 나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그 음악 청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팬싸이트에서는 끊이지 않는 싸움과 스토커 색출작업이 한창이다.
시대의 상징쯤 되어 버린 ‘서태지’가 감내해야 하는 폭력은 공허한 말잔치들 속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음악 청년은 일단, 사생활을 반납한다. 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으로만 침잠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커튼을 열면 창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시선들 때문에 창문조차 커튼조차 열지 않는다. 외국으로 외국으로 유목민 생활을 한다 해도 그를 찾아낼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 사람들’은 이 음악 청년을 사랑한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자기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다. 그래서 소문을 낸다. 그 음악 청년이 쌓아온 이미지와 정반대에 있는 듯한 지저분한 추문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너무 깨끗해서 더럽혀 주고 싶었다”는 그들의 고백은, 그 추문들로 인해 모두가 떠나가고 나면 제일 마지막에 나 혼자만 남을 수 있을 거라는 망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그 스토커들을 퇴치하겠다고 지금 쌍심지를 켰다. 골라내고 추려내고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지만 쉽지 않다. 추문의 경중과 스토커질의 경중을 따져 묻기도 한다. ‘어디까지’인지를 궁금해하는 호기심과 사랑하는 사람을 스토커들로부터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끔찍한 사랑이 뒤섞여 싸우고 있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하나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피곤하다. 그 음악 청년의 지친 생활과 상처들을 들쑤시지 않고는 도저히 진전되지 않는 문제이다. 문득, 그 사람은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 대 일의 사랑도 곧잘 의심되는 위기에 처하곤 하는데, 일 대 다의 사랑이라니. 섬뜩하지 않은가.

공연장에서 다수 속에 섞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나’는, 그를 사랑하는, 그가 사랑하는 ‘누군가’이다. 분명히 사랑의 주체요 대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들 속에서만 가능하다. 내가 내 이름을 걸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의 앞에 서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그 순간 그에게 나는 생면부지의 타인이 돼버리는 것이다.

피곤하고 지친다. 한 인간의 이름에 덧씌워진 숨막히는 시대적 상징도, 한 인간의 사생활을 공중분해시키는 끔찍한 사랑도, 그 사랑을 심판하겠다는 또 다른 집요한 사랑도, 실체가 어디 있는지 찾기 어려운 나의 감정도…. “내가 받은 위로와 그 충고들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노래하는 한 명의 음악 청년의 어디만큼에 순수하게 가 닿을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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