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의 표절시비, 이중언어, 문학적 고향..

1.

소설가이자 시인 이응준 씨가 온라인 매체 ‘허핑턴 포스트’에서 문단생활을 포기할 각오라는 비장한 말까지 꺼내며 신경숙이 일본 작가 미시모 유키오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글을 썼다.

한국일보 http://hankookilbo.com/m/v/9963266b9c414f40b40e26036adfab60
경향신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161739421&code=960100
이응준의 허핑턴 포스트 원문 http://www.huffingtonpost.kr/eungjun-lee/story_b_7583798.html

신경숙 표절시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여러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원작으로 여러 번 제기됐었다. 다만 언제나 한국문단이 말하는 소위 문단권력의 변방에서 소소하게 거론되다가 이상하리만큼 평온하게 일단락되곤 했다.

명백한 표절로 보이는 대표적인 부분만 보면,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와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에서)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신경숙의 <전설>)

 

게다가 저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표현은 미시마 유키오의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우국>을 번역한 시인 김후란이 창조해낸 표현인데, 그 번역문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난 문학계의 ‘문단’, ‘등단’이라는 해괴한 표현도 이상하거니와 문학계의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명백히 눈에 띄는 몇몇 대학교수 겸 평론가들과 메이저 언론사, 그리고 작가들 사이 자기들만의 카르텔, 권력 같은 것도 요상스럽다. 교수 겸 평론가들, 언론사, 출판사, 작가가 친하게 지내면 으레 자기들만의 세력을 형성하고 그 권력 밖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제기는 거의 작가로서의 목숨 전체를 걸고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이 요상한 권력집단의 모습이다. 그러니 난 평론가와 작가가 친분을 자랑하는 것만큼 괴상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두 직업을 겸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평론가와 작가를 겸직하면 각각의 영역에서의 맥락과 친분이 결국은 다른 쪽을 침범하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비평계가 주례사 비평 남발로 오명을 뒤집어쓴 지 오래지만, 난 작가가 평론을 겸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신경숙은 조선일보의 대표적 문학상 동인문학상의 종신 심사위원이고 조선일보 덕분에 성장한 문학동네의 편집위원 남진우 시인 겸 평론가는 신경숙의 남편이기도 한다. 뭐 신경숙은 그나마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니까 대표적으로 거론됐지 이 외에도 무수한 유명작가들의 표절시비들이 대체로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나 대학 다닐 때 한창 이명원이라는 젊은 박사과정생이 문단의 오랜 권력자 김윤식의 평론이 가라타니 고진의 표절이라는 제기를 해서 피튀기는 논쟁(논쟁이라기보다 이명원이 일방적으로 김윤식의 제자인 교수들한테 당한 모양새;)을 했던 기억도 나는데 그 뒤로 김윤식이 어떤 입장표명을 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나도 신경숙은 자전적 소설 <외딴방> 을 꽤 좋게 읽었고 언젠가부터 잘 안 읽게 된 세월 동안 무수한 표절논쟁과 아무것도 없는 입장표명 사이에서 문단의 대표적 권력 작가가 되어가는 걸 지켜봐왔다. 내가 한국문학의 열혈 독자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만큼은 절실한 것이, 내 몸과 정신에 새겨진 언어가 ‘한국어’이기 때문이다. 외국 작가의 작품이 아무리 유려하고 기발하다고 한들 그 언어는 한국어가 나를 감동시키는 만큼의 100분의 1도 따라올 수 없다. 그러하니 한국문학계가 이렇게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의 과오를 고치지 않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2.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교에서 읽게 될 문학이 내가 읽었던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가끔은 내 가슴 한켠을 허전하게 한다. 한국의 등줄기 같은 태백산맥을 무대로 한 <태백산맥>이나 그 안의 벌교 갯벌에 대한 묘사, 지리산 등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에 밀착된 정서 대신 우리 아이들은 캘리포니아의 샐리나스 계곡에서 나고 자란 존 스타인벡의 정서와 밀착하면서 <토르티야 들판>, <생쥐와 인간> 등을 읽게 되겠지. <분노의 포도> 속 대공황 시대, 모래폭풍이 계속되는 중서부 오클라호마, 아칸소, 캔자스의 대평원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걸었던 ‘루트 66’에 공감하며, 미시시피의 아들이라고까지 불리는 허클베리핀의 미시시피 강 등을 문학적 고향으로 삼아 크게 되는 걸까. 물론 이 작품들은 나도  관심이 많기도 하고 커가는 아이들과 공감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번역문학은 거의 새로운 창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 번역작품을 원작이라고 여길 수도 없고 아무리 끙끙대며 원작을 읽어내도 그것은 내 정서와 겉도는 외국의 언어일 뿐이다.

나의 궁금증 중 하나는 우리가 이중언어를 지키려고 노력하며 키우겠지만 그렇다한들 우리 아이들이 두 나라의 언어가 각각 가지고 있는 감성, 해당언어의 문학작품이 태어난 사회의 맥락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적 밀착감을 동등하게 느끼며 자랄 수 있겠냐는 것이다. 결국 우리 아이들의 모국어가 한국어라 할지라도(계속 여기서 자란다면 사실 아이들의 모국어가 영어가 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아이들의 육체가 놓인 땅의 맥락과 정서적으로 밀착할 수 있을 뿐, 한국이란 세계는 아이들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하니 나는 미국에서 자라게 될 아이들의 문학적 고향이 나와는 전혀 다른 정서를 가질 것이라는 걸 인정한다. 다만.. 예컨대은율이는 종일 책만 보고 앉아 있으면서도 지루해하지 않고 책 좀 읽어달라고 나를 괴롭힐 만큼 책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만약 은율이가 이 땅에서 자라며 영어책 못지 않게 한국어책을 많이 읽고 나이에 맞는 한국어책을 무수히 읽으며 자라면 한국 문학과 어느 정도 정서적 밀착감을 가질 수 있을까. 적어도 유년기 어린 시절부터 접한 언어와 문학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밀참감은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어린시절에 <주말의 명화> 등에서 본 미국 시골의 농장 풍경이나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 접한 미시시피 강에 어떤 향수를 가진 걸 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 같긴 한데.. 어떨지 모르겠다.

 

 

Comments on this post

  1. 심은하 said on 2015-06-18 at 오전 10:45

    1.
    나 문학 잘 모르지만 20대에 유독 신경숙 문장에 위로 많이 받았었는데..
    내 몸속에 시골촌년의 세포가 있는건지, 공지영 은희경보다는 신경숙이 끌렸는데.ㅠ
    엄마가 되고나서 본 책 ‘엄마를 부탁해’의 몇몇 문장들도 한동안 내 산후우울증 호르몬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켜줬었는데..ㅠ
    별로 믿고싶지않고, 걍 정말 필사를 너무많이 하다보니 그리된거라 생각하고싶고.
    문학계가 타락하진 말아야겠지만, 아니 이미 타락된건 고쳐져야겠지만..
    난 앞으로도 신경숙 글을 보고싶은데..
    제발 이응준이란 작가가 유명해지고 싶어서 객기부린 것이길 바라고있고(믿기 싫어서 소시오패스적인 발악중 ㅋㅋㅋㅋㅋ)

    2.
    아이들 한국어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식으로 노력하고있어?
    나는 여기서 나랑 대화하거나 한국책 읽어주는게 다인데..넌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할지 늘 고민..공간적 한계 내에서.

    • wisepaper said on 2015-06-18 at 오후 12:13

      1. 저도 20대 때 <외딴방> 읽고 정말 좋았어요. 그 작품이 신경숙의 최고작이라 생각할 정도로.. 몇몇 단편 중에 맘에 든 것도 있긴 했었고. 맞아요 신경숙이 습작하던 시절 필사를 엄청나게 했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저건 필사했던 게 머리 속에 잔상이 남아 의도치 않게 나와버린 경우하고는 다른 거 같아요ㅠ.ㅠ 표현뿐 아니라 문장의 순서까지 똑같으니까요. 의도적으로 표절했다고밖에는 볼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 작품만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여러 작품에서 비슷한 경우가 논쟁이 되고 있어요. 표절은 습관이라고 하더라구요. 대응이라도 “필사를 하던 습관이 나와서 비슷한 문장이 나왔다. 죄송하다.”로 했으면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텐데 “나는 저 작품을 아예 모른다”는 말도 안되는 대응을 하고 출판사 창비도 되도않는 쉴드를 쳤더라구요..ㅠ.ㅠ 이젠 인터넷 시대라 그냥 넘어가긴 힘들거에요.

      차라리 작가로서의 온 자존심을 걸고 진심으로 죄송하다, 앞으로 전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겠다. 그랬으면 모르겠는데….ㅠ.ㅠ 신경숙이 창비에 벌어다준 돈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창비도 저러는 거겠죠. 근데 신경숙 외에도 지금 표절이 명백해보이는 작가들이 엄청 많아요. 줄줄이 나오고 있어요.

      2. 아이들 한국어는.. 아직까지는 외국생활이 얼마 안 됐으니 그저 하던대로 한국어로 대화하고 한국어책 읽는 정도로 하고 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 아이들 한국어가 한국애들 또래만큼 안 되기 시작할 날이 오겠죠. 그 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저도 생각을 더 해봐야 할 문제같아요. 유라 같은 경우는 아직 어리니까 모국어인 한국어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한국어로 말 많이 걸어주시고 책 읽어주시고 가끔 시간 정해서 한국어로 된 만화 동영상 같은 거 보여주세요. 저희 애들도 그렇게 하려구요. 모국어가 한국어라도.. 언젠가 우리 아이들은 아마도 영어가 한국어보다 더 편할 날이 올 거고 유라도 중국어가 한국어보다 더 편할 날이 올 거에요. 그건 부정할 수가 없어요. 다만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서 한국어 수준이 또래에 맞는 수준을 따라갈 수 있게 하는 게 목표구요. 조금 쳐지긴 하겠지만요..ㅠ.ㅠ 애들 언어는 부모나 선생님보다 또래가 하는 말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게 확실해요. 그러니 한국어도 잘 하려면 한국어 쓰는 아이들과 생활하는는 경험을 만들어 주거나, 그게 안 되면 또래 아이들이 보는 동영상이라도 틀어줘야 할 거에요.

      또래 아이들과 생활하는 게 최고인데 그러려면 한국어를 잘 하는 아이들과 있어야 하는데 그건 외국에서 좀 불가능한 일 같구요. 그나마 같이 한국어를 배우는 애들과 있을 수 있는 장소- 한국어학교나 한글학교-에 보내는 것도 생각해봐야지요. 여긴 한국어학교가 있거든요. 주말에만 하는 무료학교에요. 우리 아이들은 아직 필요를 못 느끼지만 나중에 영어를 더 편해 하는 날이 오면 여기도 보낼지 모르겠어요. 이 동네에 한국애들을 종종 보는데 부모 따라 1년 단기 연수로 온 애들 빼고 여기서 오래 산 애들은 거의 한국어를 잘 못해요..ㅠ.ㅠ 우리 열음이가 최고 수준인듯..ㅠ.ㅠ

  2. 심은하 said on 2015-06-18 at 오후 5:39

    나두 또래애들 만나게 하고파서 조선족들한테 접근중인데 그애들도 한국말 잘 못하는 애들이 태반이라 고민이 되었어.
    글구 저 신경숙은 나 요며칠간 계속 충격..멘붕이야. 아직도 사기 아니라고 믿고싶음ㅋㅋㅋㅋㅋ

    • wisepaper said on 2015-06-19 at 오후 4:27

      저두 신경숙의 내향적이고 가라앉은 분위기의 문체는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표절로 무너지지 말고 표절 건 제대로 밝히고 글은 계속 썼으면 좋겠어요. 근데 이렇게 뭉개고 넘어가면 (독자들의 신뢰를 받는 측면에서는) 재기할 수 없을 거 같아서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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